과학이 나를 부른다 - 과학과 인문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30편의 에세이 APCTP 크로스로드 1
APCTP 기획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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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명의 지식인들이 과학과 인문학의 경계를 넘다드는 글을 엮어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30인이 하는 일도 다양하다. 소설가에서부터 과학책 번역가, 인문학자, 자연과학자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다.  이 책이 바로 <과학이 나를 부른다>(사이언스북스.2008년)이다.  이 책은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 ‘과학 밖에서’는 인문학자들이  바깥에서 과학을 들려다 본 글들을 모은 것이고, 2부 ‘과학의 변경 지대에서’는 인문과 자연과학 두 분야의 학자들이 인문학과 과학간의 간극에 대한 고민을 볼 수 있다. 마지막 3부는 ‘과학 안에서’인데 과학자의 어려움에 대해 토로하고 있다. 그러나 30명의 전문가들은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즉 과학과 인문학이 소통해야만 한다고 본다.

 

이 책의 제일 첫 글은 소설가 김연수다. 어려서 추리소설을 읽으면서 성장한 그는 이제 한국 문단에서도 자리를 확고하게 잡고 있다. 그런 그가 과학과 문학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좋은 글쓰기란 가장 구체적인 것들을 상정하고 그것들이 합리적으로 서로 간섭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보편적인 인식을 끌어내는 과정이다. 다시 말하자면 가장 과학적인 것이 가장 문학적이라는 이야기다.”

김연수의 말은 리처드 도킨스가 <무지개를 풀며>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많이 닮아 있다. 뉴턴이 프리즘으로 무지개를 분석해내자 영국 낭만주의 시인 키츠가 이를 두고 시정(詩情)을 말살했다고 이야기했지만, 도킨스는 오히려 “과학은 위대한 시적 영감의 원천”이라고 말했다. 나아가 ‘시적 과학’이라는 표현하면서 문학과 과학의 불가분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즉 “좋은 시적 과학이란 운문으로 쓰인 과학이 아니라 경이로운 시적 감성으로부터 탄생한 과학을 말한다.”고 주장한다.

 

도킨스와 키츠의 관계처럼 문학과 과학, 인문학과 과학은 오랜 동안 상당한 거리를 두었다. 서로는 상대방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상대방이 가까이 오는 것조차도 꺼렸다. 이는 자연의 현상이나 사물에 대해 묘사나 기술하는 방법이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현상은 종언을 고해야 할 시점에 도달한 것이다. 지식을 통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아주 커졌기 때문이다. C.P, 스노에서 에드워드 윌슨에 이르러서는 서로 제 갈 길을 찾아가던 학문들이 함께 연구하고 나아가 이들을 통합해야 한다고 말한다.


철학자인 김용석교수는 ‘포스트 글로브 시대’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고대 그리스에서 철학과 과학이 함께 탄생했음을 아주 논리적으로 잘 설명을 하고 있다. 또 다른 글에서는 20세기의 위대한 과학자인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만들어내는 근저에는 철학에 대한 공부가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화학자인 경희대 이성렬교수는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고 바람직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물질에 대한 지식 외에 인문학, 사회 과학, 예술, 종교 등등의 정신문화 또한 긴요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서로 다른 분야의 학문의 이해와 통합이 우리 인류의 미래를 위해 필요하다보고 있다.

이 책에는 위에서 소개한 이외에도 과학과 종교에 대한 글도 있고, 30편의 에세이가 아주 잘 엮여져 있어, 이 시대에 학문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다. 과학에 관심이 없거나 혹은 과학을 백안시하는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이런 사람들이 이 책을 읽는 다면 과학에 대해 좀 더 친근함을 가지게 되리라고 생각이 든다. 이 시대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과학이 해결해주지는 못하지만, 과학은 우리 문명을 지탱해주는 중요한 조건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제목처럼 ‘과학은 우리를 보고 가까이 오라고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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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살 철학소년 - 생각의 스위치를 켜라
김보일 지음, 구연산 그림, 고흥준 편집 / 북멘토(도서출판)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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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위한 철학 에세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 <14살 철학소년>(북멘토.2008년)은 청소년들에게 세상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이를 뒤집어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기 위해 현재 국어교사인 김보일이 쓴 책이다.

필자가 청소년시절에는 정보를 습득하기 위한 방법은 어른들의 말씀, 책 그리고 또래 집단에서가 거의 전부였다. 그러나 요즘은 많이 다르다. 특히나 인터넷은 수많은 정보로 가득 차있다. 그런데 그 많은 정보가 옳은 것은 아니다. 이 중에는 잘못된 정보도 수두룩하다. 어쩌면 인터넷에 있는 정보 중 많은 수가 잘못된 정보다. 이는 ‘정보의 오염’이라고 까지 표현될 정도로 왜곡된 정보가 판을 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정보의 홍수 속에서 어떤 것이 옳은 정보이고  어떤 것이 잘못된 정보인지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하지만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성인들조차도 이를 제대로 판별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잘못된 정보를 진실로 판단한다면 사회적인 문제가 발생할 개연성도 충분히 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가치를 포함하고 있는 어떤 정보나 가치에 있어서도 그것을 한 번쯤은 다시 생각해보고, 나아가 역으로 판단해봐야 한다. 특히나 경험이부족한 청소년기에는 이러한 방법이 더욱 중요하다.

그러면 책의 내용으로 들어가서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

‘많이 가진다고 행복할까?“하고 저자는 묻고 있다. 아마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이 말에 어느정도 수긍을 할 것이다. 왜냐하면 물질만능 시대에 있어서 ’소유‘는 복음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국가의 경제력과 행복 지수는 결코 정비례하지 않는다.“ 라고 단언하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행복 = 소유/욕망‘이라면 분자인 소유가 아무리 커진다 해도 분모인 욕망도 같이 커진다면 행복감은 결코 증진되지 않는다. 그러나 욕망이 크지 않다면 소유가 조금만 늘어나도 쉽게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저자는 적절하게 욕망을 조절하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과연 어떤 풀을 잡초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생각해보기로 하자. 먼저 잡초라고 하면 우리 인간이 필요로 하는 작물 재배에 훼방을 주는 풀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약 이 잡초가 우리에게 필요한 작물보다 인간에게 더 유용한 점이 있다고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러니까 잡초와 필요한 작물을 구분하는 기준은 순전히 인간의 필요에 따른 것이다. 그렇지만 지구 전체적으로 생각해본다면 모든 것이 우리 생태계에 필요한 것들이다. 인간이 마치 지구의 주인인 것처럼 생각하는 자체가 오히려 문제가 있다. 저자는 이것보다도 더 의미를 확장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하루 평균 136종의 생물이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매년 250~300종의 야생 동식물이 멸종되고 있다는 것이 환경부의 추산이다. 지금 쓸모없다고 해서 멸종을 방치했다가 나중에 아쉬워해도 헛일이다. 어떤 것은 잡초라고 해서 푸대접을 하고 어떤 것은 작물이라고 융숭한 대접을 하는 태도부터 고쳐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공의 중심은 어디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도 대단히 교훈적이다. 일단 이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공의 중심은 공의 표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가운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나라들은 자신의 나라가 중심인 것처럼 지도를 그리거나 자신의 나라를 기점으로 경도를 그리곤 한다. 물론 경도의 기준점은 이미 영국으로 판가름이 났다. 이는 힘의 논리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힘의 논리는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용어로 확장이 된다. 유럽의 입장에서 아시아는 동쪽에 있는 나라이기에 오리엔트라고 불렀으며, 어의가 확장되어 오리엔탈리즘은 열등하다는 뜻으로 변해버렸다. 즉 서양인들은 자신들을 기준으로 삼아 동서로 나누고 또 동쪽을 열등하다고 까지 생각한 것이다. 공의 중심은 안보이는 곳에 있거늘 그들은 이러한 상식마저도 그들에게 유리하도록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 책에서는 우리에게 익숙해있는 것들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고는, 그 뜻이 잘못일수도 있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한다. 자기 정체성이 확립되어 있지 않은 청소년들에게 아주 필요한 내용들이다. 아니 성인들에게도 읽을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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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는 한 장짜리 기획서도 다르다
임정섭 지음 / 크레듀(credu)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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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문자를 발명한 이래 오랫동안 문자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것은 상류층만이 가질 수 있는 하나의 훈장 같은 것이었다.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능력을 가짐으로 인해 지식을 독점할 수 있었다. 이러한 지식독점시대는 근대 교육 이후에 없어지기는 했지만 지금도 글 읽기와 쓰기를 못하는 문맹자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또한 글을 읽고 쓸 수 있다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잘 쓰는 능력이다.

 

글쓰기가 일반인에게도 보편화되었지만, 글을 잘 쓴다는 것은 또 다른 일이었다. 즉 글쓰기는 관료나 기자, 문학가나 저술가 등 일부 계층 사람들에게만 허용된 것이었다. 일반인이 글을 쓴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글쓰기는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닌 일반인에게도 필수적인 요건이 되었다. 특히나 인터넷 시대에 들어오면서 글쓰기는 일반인들에게도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신문이나 책을 통해서만이 자신의 글을 남에게 널리 보여줄 수 있었으나. 이제는 인터넷을 통해서 쉽게 불특정 다수에게 자신의 글을 알리게 된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글쓰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다. 글쓰기 능력은 선천적으로 타고 나지 않는다. 말하는 능력은 어느 정도 유전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말하기는 우리 유전자와 뇌에 존재한다. 그러나 문자는 발명된 지 오래되지 않았기에 우리 유전자 안에 들어올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글쓰기는 배워야 한다.


이 책 <프로는 한 장짜리 기획서도 다르다>(크레듀.2008년)는 제목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비즈니스 글쓰기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비즈니스 글이나 일반적인 글이나 남에게 읽혀져야 하는 글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저자인 임정섭은. “우리가 흔히 범하는 오류 중의 하나는 비즈니스 글쓰기와 편지나 수필, 논술 등과 같이 비업무적 글쓰기를 다르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모든 글쓰기는 형식이 다를 뿐 하나의 목표를 향한다는 점에서 똑 같다. 그 목표란 글로 글쓴이의 생각을 명쾌하게 전달하는 것이다.”(110쪽) 라고 말하며 ‘모든 글쓰기는 하나로 통한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저자가 글쓰기를 잘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스타 이론’을 소개하고 있다. 저자만의 독특한 방법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스타 이론이 무엇인지를 알아보도록 하자. 일단 저자는 스타 이론을 비즈 라이팅과 연계하여 설명하고 있다.

스타 이론은 꼭지점이 5개인 별을 그리고 각 꼭지점을 5개의 단계로 나누고 있다. 첫꼭지점은 1단계인데 '아이디어를 떠올리기(Idea)'라는 제목을 붙이고 있다. 두 번째 꼭지점은 ‘생각 토해내기(Think out)', 세 번째는 ’정리하기(arrangement)', 네 번째는 ‘조사와 분석하기(Research)'’, 마지막 단계는 ‘글쓰기(Biz Writing)'라고 말하고 있다.

단계별로 부연설명을 하자면

1단계(Idea)는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단계로, 무엇을 쓸 것인지에 대해서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목적에 따라 기획서, 제안서, 보고서 등으로 나눌 수 있다.

2단계(Think out)는 기획의 주제와 관련된 모든 사항을 생각나는 대로 모두 토해내는 과정으로 단어들을 마구 적어 나가는 단계이다.

3단계(arrangement)는 2단계에서 토해낸 단어들을 문장으로 정리하는 과정이다.

4단계(Research)는 관련된 자료를 조사하고 분석하는 단계로 기획의 문제점이나 의문점에 대해 생각해보는 단계다.

마지막 단계(Biz Writing)는 글을 쓰는 단계로 비즈 라이팅의 최종 과정으로 문서를 완성하는 단계이다.

위에 설명한 스타 이론은 비즈니스 글쓰기에서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글쓰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일단 어떤 주제로 글을 쓸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첫 단계이고, 선택된 주제에 맞추어 그에 해당하는 단어들을 생각해내고 이를 정리하고, 네 번째는 관련된 자료를 조사하고 마지막으로 글을 쓰면 된다.  

 


생각해보니 필자의 경우에도 글쓰기를 할 때에는 스타이론과 비슷한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특히나 2단계인 ‘생각 토해내기(Think out)’는 필자가 아주 중요시하는 과정으로 필자는 주제와 관련된 단어들을 가급적이면 많은 양을 스크립트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글을 쓸 때에는 이 단어들을 순서에 맞추어 정리하고 논리적인 문장으로 이어나간다. 그럼에도 글쓰기는 항상 어렵다. 이 부분을 쉽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실전을 많이 해야 하는데, 이 책의 후반부에는 저자가 직접 작성한 문서를 중심으로 실전 매뉴얼이 있어, 독자들에게는 글쓰기 실력을 높일 수 있는 좋은 사례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비즈니스 글쓰기에 대한 내용이지만, 읽어 나가는 과정에서 ‘모든 글쓰기는 하나로 통한다’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는 글쓰기란 자신의 생각을 다른 이에게 효과적으로 명쾌하게 전달하기 위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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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사진에 박히다 - 사진으로 읽는 한국 근대 문화사
이경민 지음 / 산책자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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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京城)이라는 단어에는 슬픈 느낌이 들어있다. 그것은 한일합방으로 서울인 한성의 이름을 고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성의 사진에 나타난 풍광이나 사람의 모습에는 뭔지 모르게 슬픔이 배어나오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식민지 시대 경성의 사진을 보면 우리의 가슴 아픈 근대사가 그 안에 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사진아카이브연구소’를 운영하면서 근대 사진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있는 이경민의 <경성, 사진에 박히다>(산책자.2008년)는 사진으로 우리의 근대 문화사를 꿰어내고 있다.

나의 지난 사진이 들어있는 앨범을 한 번 들여다본다. 즐겁게 웃고 있는 모습의 사진이 많다. 그러나 웃고 있는 사진 속의 내가 그때 정말 즐거웠던 순간이었던가에 대해 의문을 던져보자. 즐거웠을 수도 있었겠지만 단지 카메라를 보고 웃음 지었던 적은 없었던가? 그렇다 사진은 반드시 진실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 안에는 개인적인 이해관계도 있고 이데올로기도 있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저자는 식민시대의 “사진으로 재현된 이미지 이면에 작동하는 일본식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에 주목하면서” 바라보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저자는 그 시대의 사진을 어떻게 읽어내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이 책 본문에 제일 처음 나오는 사진은 만해 한용운의 사진이다. 그런데 그 사진은 수형기록표에 있는 사진 두 장이다. 만해의 정면사진과 측면사진이다. 즉 이 사진에는 국가 권력이 통제와 관리를 위해 사진을 활용한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사진을 국가 권력에 의한 국민 통제 방식으로의 활용은 현재 주민등록 사진과 여권 사진에 까지 연결되어 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게다가 이런 사진 활용은 사진업자들의 배를 두둑하게 해주고 또 사진 산업이 발전하게 되는 기반이 되었다고 하니, 우리를 슬프게도 하고 슬며시 쓴 웃음이 나오게도 한다.

사진 촬영에 있어서는 금기가 작용하는 부분도 있다. 지금도 군부대 담에는 사진 촬영을 금지한다는 경고문이 붙어 있다. 이것은 식민지 시대에 시작된 모양이다. 이 책에 보면 각종 법률로서 사진 촬영을 금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순종의 인산일에는 이 행사를 촬영하는 것에서도 촬영이 자유롭지는 않았다.

 

사진관에 대한 부분도 놓칠 수 없는 부분이다. 19세기 말에 조선인들에 의해 사진관이 생겨났다는 것은 상당히 놀라웠다. 생각보다 사진관이 일찍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기에는 일본인들이 사진관 시장을 장악했었고, 식민지 시대에 들어와서도 일본인에 의해 운영되는 사진관이 더 많았음을 통계에서 볼 수 있었다. 

 

또한 흥미로운 것은 사진결혼 이야기다. 요즘은 동남아 여성의 사진을 보고 국제결혼을 하는 일이 많이 있지만, 이 시대에는 하와이로 노동이민을 간 사람과 조선인 처녀들 사이에 사진을 통한 결혼이 성행했었다고 나온다. 식민지 시대에 누드 사진이 인기가 있었다는 부분도 재미있다. 하기야 조선 시대에도 춘화도(春畵圖)가 있었으니, 사진기가 있는 시절에는 당연히 에로사진이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는 있지만, 식민지 시대에 에로 사진을 판매하기 위해 신문에 광고까지 게재했다는 것은 상상이 가지 않는다. 남의 몸을 보고 싶어 하는 욕망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인간의 본성인가보다.

 

이 책에서 보듯이 조선의 근대화시기를 사진을 통해 조명해 보면 그 시대의 생활상이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지금보다는 훨씬 더 고단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지금의 사진을 100년 후에 우리 후손들이 본다면 어떻게 느낄 것인가를 한 번 생각해본다. 지금은 어느 집이나 디지털 카메라가 한 대 씩은 있다. 사진 촬영이 대중화 되었기에 그 생산되는 사진도 엄청나다. 기뻐하는 얼굴 사진에서 부터 사건 사고 현장도 있을 것이고, 아이들의 예쁜 모습도 있을 것이다. 아마 우리의 희로애락이 모두 그 안에 들어있을 것이다. 이렇듯 사진은 그 시대의 속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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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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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눈먼 자들의 도시>(해냄.2002년)를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그것은 우리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오래전부터 주변사람들로부터 꼭 읽어보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이번에야 읽게 되었다. 마음은 불편했지만 그들이 적극적으로 추천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었다.


독자들은 작품의 무대는 아마 저자인 주제 사마라구의 고국 포르투갈이나 서양의 어느 한 도시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공간을 초월해 한국인 독자들이 읽어도 공간적인 차이를 느낄 수 없이, 그 분위기를 그대로 느낄 수가 있다. 아마 이런 점이 이 책의 특징일 것이다. 아니 이런 부분이 세계적인 명작이 가지고 있는 요소일 것이다. 서양과 동양의 공간 차이를 넘어서는 인간의 보편적인 특성을 저자가 아주 잘 끄집어냈기 때문이다. 아무도 나를 처다 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 사람들은 어떤 행동도 할 수 있는 존재다. 그런데 남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 때문에 인간은 점잔을 빼고 자신의 본성을 가슴 깊숙이 숨긴 채 가식적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이 책의 특징 중 하나는 문장의 대화체였다. 대화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사용하는 따옴표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는 얼마간 불편했지만, 읽어나가면서 이렇게 불편했던 느낌은 독자들에게 오히려 상황을 긴박하게 느끼게 하는 것 같았다. 강력하게 독자들을 숨 돌릴 여유조차 없이 밀어 붙이는 듯한 사마라구의 문체는 소설의 내용을 더욱 믿도있게 만드는 것 같았다.

 

또한 소설의 소재도 아주 생경하다. 소설의 시작부터 독자들은 숨이 막힐 지경이다. 갑자기 운전을 하던 사람이 신호 대기 중에 눈이 멀어버린다. 그런데 이 실명은 강력한 전염성을 가지고 있어서 불과 몇일 사이에 온 도시의 사람 모두가 눈이 멀어버린다.

 

눈이 먼 사람들은 원래 정신 병원이었던 장소로 수용이 된다. 그들은 사회로 부터 철저히 격리된 것이다. 눈이 먼 사람들만이 살아가는 장소, 원래 장님이었다면 그들은 새로운 장소에서도 어느 정도 적응할 수 있었을 테지만, 갑작스레 눈이 먼 그들에게 새로운 장소에서의 삶의 어려움과 고통은 독자들에게 그대로 전달된다.

 

여기에서 작가는 독자들을 약간 안도하게 만든다. 그것은 단 한 명의 여자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자들은 전개되는 상황을 그 한 명의 보이는 여자의 눈을 통해서 인식할 수 있다. 그녀는 소설에서만 구세주 같은 존재가 아니라 마치 독자들에게도 신적인 존재로 다가온다. 그렇지만 이어지는 상황마다 독자들은 절망하고 분노한다.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도 인간의 본성은 그대로 살아있는 것 같다. 그 수용소에서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더 많이 먹기 위해 아웅다웅하며, 또 조직을 만들어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한다. 게다가 권총은 하나의 권력으로 작용한다. 권총을 가진 사람은 권력자가 되어 음식을 통제하고 이를 통해 여자의 몸도 통제하려고 시도한다. 이어서 벌어지는 상황은 점입가경이다. 먹을 것을 위해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정조를 버리라고 요청한다. 자신의 여자를 빼앗기게 된 남성들은 왜 조직적으로 대항하지 않는지 화가 날 지경이다. 이 장면에서 마치 권력에 대항하지 못하고 자신의 안전만을 도모하려는 현대 소시민의 모습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구세주인 눈 뜬 여자는 혁명의 전사로 나타난다. 권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살해하고 그곳 수용소의 사람들을 해방시킨다. 이 부분에서 독자들은 마치 자신이 해방된 것 같은 느낌이 들 것이다. 자! 이제 해방이 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기다리고 있던 다음 상황은 어떤가.


과연 인간적이란 단어의 뜻은 무엇일까?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인간의 정체성에 대해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남이 나를 보지 못한다 해서 과연 내 행동을 변하지 않을까? 이 의문에 대해 나는 제대로 된 답을 할 자신이 없었다.

<중용>과 <대학>에 보면 신독(愼獨)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홀로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몸가짐을 바로 하고 언행을 삼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는 군자들이 자신의 몸가짐을 항상 바르게 가지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필자가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생각난 단어가 바로 신독이었다. 그렇지만 이 책 어디에도 신독은 쓰일 곳이 없었다. 그렇다 우리 모두는 군자가 아닌 것이다. 이 소설 속에서 오로지 본능의 충족을 위해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바로 내 모습이었고 우리들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인간은 그 어떤 야수보다도 무서운 존재이고, 또 상황에 따라서 어떤 행동도 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었던 것이다. 나도 그 인간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이 나를 두렵게 한다.  ‘가장 두려운 것은 오직 나만이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가 이 책의 부제다. 혼자만 볼 수 있는 그녀는 그 두렵고 무서운 인간들을 본다는 것이 무서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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