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춘추전국시대 역사를 보면 유난히 반복하여 등장하는 나라이름이 있다. 바로 진나라이다. 그러고보면 춘추전국시대에도 진나라가 있었고,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삼국 - 위, 촉, 오 - 시대 이후에도 진나라가 다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실제로 이 진나라들은 모두 다른 나라들이다. 이는 어쩌면 우리나라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찾아오는 어쩔 수 없는 난관일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한자로 쓰면 모두 다른 국명이 된다. 진陳, 진晉, 진秦 이렇게 말이다. (춘추시대에 사실 매우 작은 나라인 진軫나라도 존재하였다고는 하지만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가 않다.) 실제 중국어로 읽는 방법도 조금씩 다르다고 한다. 이후 사마염의 진나라 및 오호십육국 시대에 무수한 진나라들이 등장하지만, 그 진나라들의 한자 자체는 위의 세 한자가 번갈아가며 나타난다. 예를 들자면 사마염의 진나라는 서진이라고 부르며, 한자로는 이렇게 쓴다 ; 西晉.

 

이 글에서는 위의 세 진나라, 진陳, 진晉, 진秦 에 초점을 맞추어 간단하게 서술해보고자 한다. 오호십육국 시대의 전진, 후진, 등의 나라들 또한 동일한 한자를 쓰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이 별개의 나라들이지만, (앞의 전前은 후대의 역사가들이 편의로 붙인 명칭이다. 국호 자체는 진나라들이다. 그러니 동일한 한자를 사용하였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너무 많은 국가가 명멸하였기에 일일이 다 언급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춘추전국시대 역사 관련 사료를 읽을 때 나오는 진나라에 대하여 파악하고 싶다면, 위의 세 나라에 대한 언급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먼저 본격적으로 내용에 들어가기에 앞서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에 대하여 이야기를 조금 적어놓을까, 한다. 춘추시대는 서주가 멸망하고 동주로 수도를 옮겨 그 명맥을 유지했을때, 여러 제후들이 왕을 존중하고 이민족을 쫓아낸다는 기치 아래에 거병한 때를 일컫는다. 이 시대의 이름은 춘추, 라는 책을 따서 명명이 되었다. 이때만 해도 왕을 존중한다는 명분이 있었기 때문에 감히 천자를 논하지 못했다. 하지만 전국시대는 달랐다. 이 시대는 진晉나라가 멸망하고, 한, 위, 조, 이렇게 세 나라로 쪼개진 시점을 기점으로 잡는다. 이때부터는 왕을 그다지 존중을 하지 않게 되었다. 한, 위, 조 세 나라는 왕이 먼저 승인을 한 뒤에 쪼개져 나간 것이 아니라, 먼저 쪼개진 뒤에 왕에게 승인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저 선후관계가 바뀌었을뿐이지만, 이는 매우 큰 차이다. 후자의 경우엔 왕권은 그다지 중요하지가 않다, 라고도 생각할 수 있으니 말이다.

 

세 나라 모두 시기적으로 엇비슷하게 시작하지만, 그나마 추측해보자면 진秦나라가 가장 먼저 등장하였으리라 본다. 나라로서의 진나라가 아닌, 어떤 부족연맹체로서의 등장말이다. 왼쪽의 진시황 평전의 저자인 장펀텐, 은 이야기한다. 만약 춘추전국시대를 한 사람의 일대기로 축약하여서 그 역사를 그려낸다면, 당연히 주인공으로는 진秦나라 사람이 어울릴 거라고 말이다. 진秦나라가 그만큼 오래 그 자취를 남기고 있었다, 라는 것을 반증해주는 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진秦나라의 기원은 고대 중국의 은나라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이전의 기록이 있기는 하나, 요순시대의 기록은 확인하기가 어려운 부분이 많다.) 은나라의 왕 주왕의 신하였던 비렴은 주 무왕에게 쫓겨 서북쪽으로 이주하고 만다. 이 비렴이라는 자가 진나라 씨족의 직계 선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권력 투쟁에 휩쓸려 그대로 망한 씨족의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주 목왕때 이들은 화려하게 부활한다. 바로 조보, 때문이다. 진나라 씨족 중에서 특히나 말을 잘 다루는 사람이었다. 반란이 일어났을때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몇 마리고 말을 바꾸며 천자를 모셨던 조보는, 그 행위 덕분에 천자에게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윽고 영지를 받아 춘추시대의 나라들 중 가장 서쪽에 자리를 잡게 된다. 그런데 사실 그들이 자리 잡은 영지는 그다지 좋은 땅은 아니었다. (물자가 비옥하지 않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근처에 이민족 - 주나라로 일통되지 못했던 - 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들과의 싸움에서 진나라는 먹히느냐, 먹느냐, 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여기서 주나라의 이야기를 조금 하면, 주나라는 크게 시대상으로 서주와 동주로 나뉜다. 시대상으로 앞선 서주는 말 그대로 수도가 서쪽에 있기에 저렇게 일컫어지며, 동주는 이후에 수도를 동쪽으로 옮긴 후 붙여진 이름이다. 이들의 분기점이 되는 사건은 주 유왕의 죽음이다. 주 유왕이 죽은 뒤 서주가 멸망하고, 주나라는 동주로 이름을 바꾸어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한다. 중국 고대사를 살펴보면 하나라의 걸왕은 말희때문에 멸망당했고, 은나라의 주왕은 달기때문에 멸망당했다. (물론 이렇게 단일 요인만 존재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 나라의 멸망에 이런 경국지색이 있었다고들 한다.) 마찬가지로 주나라 유왕에게는 포사, 라는 미녀가 있었다. 이 포사, 는 잘 웃지 않는 미녀였는데, 이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유왕은 무리수를 두게 된다. 그것은 봉화를 올리는 것이었다. 당시 시대상으로 봉화는 제후들의 소집에 쓰이는 그런 중요한 기구였었다. 그런 봉화를 단지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사용한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봉화에 제후들은 완전 무장을 하고 모이게 된다. 하지만 주 유왕은 그들앞에서 침략은 없으며, 그대들은 헛걸음했노라고 이야기하고, 화를 내다가 너털걸음으로 돌아가는 제후들을 보며 포사는 깔깔거리며 웃음소리를 높였다. 이런 일이 반복이 되자 제후들은 어느 순간부터 봉화를 울려도 가지 않게 되었다. 말하자면 중국판 양치기 소년이었던 것이다.

 

 

주 유왕은 이렇게 어리석었다. 하지만 단지 어리석을 뿐이었다면 주나라는 당대에는 망하지 않았을런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마지노선이었달까, 안그래도 지방 제후들의 권력은 가면 갈수록 천자의 권력에 비등해질정도로 강해지고 있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고대의 믿음들 - 삼황오제의 전설 등 - 이 그들을 끝끝내 억누르고는 있었다. 그리고 명분이 없다는 것도 한 몫하였었기에, 만약에 유왕이 어리석기만 하였었다면 주나라는 조금 더 서쪽에 수도를 둘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맹자는 말한다. 은나라의 주왕을 주 무왕이 죽인 것을 두고, '한 필부를 죽였다는 소리를 듣기는 하였으나 천하를 찬탈했다는 소리를 듣지는 못하였다' 라고. 결국에는 민심이 중요한 것이다. 당시의 주나라가 아무리 부패하였다고는 하나, 민심은 은나라 말기만큼이나 날카롭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주 유왕은 어리석기만 한 것이 아니라 포악하고 의심도 많은 사람이었다. 바로 여기서 비극은 시작되었다. 그가 한 일은 많으나, 가장 자충수처럼 여겨지는 일은 자신의 외척을 의심하고 죽이려 몰아붙였던 일이다. 그 외척은 결국 달아나 견융, 이라는 이민족과 연합하여 먼저 공격당하여 죽임을 당하기 전에 주 유왕을 죽였다. 주 유왕은 봉화를 울리라 명하였으나, 이미 여러번 낭패를 맛본 제후들이 그 봉화를 보고 달려올 리 없었고, 결국 주 유왕은 죽고, 포사는 끌려가 범해진 뒤 자살을 한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견융이 주나라의 수도를 차지하고 있지는 못했다. 위기는 언제나 기회와 함께 오는 법, 진秦나라의 당시 군주는 이 상황을 두고 예리하게 분석했다. 아직 주나라의 국운이 쇠할 때가 아니다. 그렇다면 남들이 돕지 않는 이 때 가장 먼저 가서 돕고 천자에게서 완전히 인정받는 것이 좋다, 이런 판단을 내렸던 그는 바로 군대를 몰아 견융과 외척세력을 몰아내버린다. 덕분에 오등작 - 공후백자남 - 중 백작을 받고는 제대로 된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때 진秦나라와 함께 도운 나라가 진晉나라이다. 진晉나라에 대해서는 밑에서 이야기 할 것이다.

 

앞서 진秦나라는 이민족과의 먹느냐, 먹히느냐의 싸움을 계속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 환경은 진나라인들에게는 도리어 전화위복이 되었다. 그래서 순자는 후에 진나라에 들러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진나라는 법도가 엄격하고 규율이 잘 지켜져서 백성들이 삿되지 않다, 고 말이다. 다만 순자는 그런 말 다음에 탄식을 하는데, 이는 진나라는 이민족들과 어울리다 보니, 예와 인에 대해서 잘 모른다, 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처럼 깊은 개념은 당장 이민족들과 싸워야 할 진나라에게는 익숙하지는 않았다. 아니, 당장은 소용이 되지 않았다.

 

진나라가 본격적으로 반석에 오르게 된 것은 진 목공때부터이다. 진 목공은 춘추오패의 일원으로써 그 위세를 떨쳤었는데, 그가 이렇게 오패의 일원에 들게 된 것은 그 자신의 능력도 능력이었지만, 모사들을 잘 활용했었던 것에 있다. 진 목공의 모사는 크게 두 명이 알려져있는데, 백리해와 건숙이 바로 그들이다. 가도멸괵의 고사를 아는가? 진晉나라는 근처의 괵나라를 멸망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바로 옆의 우나라에게 길을 빌려주기를 청하고, 그들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겠다, 선언하였다. 어리석게도 우나라는 진晉나라에게 길을 빌려주었고, 결국 진나라에게 멸망당했다. 이때 이 진晉나라의 속셈을 알아채고는 도망쳐 목숨을 부지한 사람이 바로 백리해이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진秦나라에서 벼슬자리에 올라서 진秦 목공을 패자의 자리에 우뚝 서게 만들었다. 건숙은 또 어떤가? 그는 진秦 목공이 승산없이 초나라를 쳐들어가려고 하자 말렸던 사람이 아닌가? 앞날을 꿰뚫어 보는 선견지명이 있었던 모사였었다.

 

여기서 공은 진晉나라로 넘어간다. 진晉나라에서도 춘추오패를 배출해내었기 때문이다. 대저 춘추오패라 함은 다음을 말한다. 제나라 환공, 진秦 목공, 진晉 문공, 초나라 장왕, 송 양공. 패는 왜 패覇인가? 제후의 모임인 회맹을 주도하기 때문에 패覇이며, 천자를 대신하고는 그 회맹의 중심이 되기에 패覇이다. 그렇기에 초 장왕은 감히 주나라의 구정의 무게를 물었던 것이다. 진晉나라의 춘추오패는 바로 문공이다. 그런데 이렇게 문공이 오패로 우뚝 서기까지는 정말 많은 고난이 있었다. 그리고 진晉나라 자체도 많은 부침이 있었다.

 

진晉 나라와 진陳 나라는 그 출몰연대가 거의 비슷하다. 그런데 굳이 따지자면 진晉나라가 앞선다. 진晉나라의 기원은 주 무왕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은 주왕에 반기를 든 희창, 그 희창의 뒤를 이은 주 무왕은 이윽고 중국 천하를 주나라의 산하로 만들었었다. 그 주 무왕의 아들이자 주나라 3대 왕인 주 성왕의 동생이 바로 진晉나라의 시조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晉 나라가 생긴 시점은 대략 기원전 1000년 정도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진晉나라가 우리가 아는 춘추시대의 진晉나라와 완전히 동일한 나라이냐면, 또 그렇지는 않다. 진晉 나라는 기원전 1000년에 어느 정도 기틀을 잡은 뒤 두 나라 - 익, 곡옥 - 로 나뉘고 말기 때문이다. 한참을 그렇게 두 나라로 나뉘어 기틀을 다져가던 그때, 곡옥의 왕이었던 무공은 익나라를 공격후 멸망시키고 하나의 진으로 다시금 통합시킨다. 이 진 무공이 후에 패자가 되는 진 문공의 할아버지다.

 

여기서 진나라의 환란이 끝이 난 것은 아니다. 후계자 문제로 저 무공의 아들인 헌공때 다시 환란을 겪는다. 헌공은 가도멸괵, 순망치한의 바탕이 되는 사건을 일으켰지만 - 괵나라를 멸망시켰다는 이야기이다. - 자신의 후계를 제대로 지정하지 않았고, 그래서 후계 문제는 미궁에 빠지고 말았다. 결국 이 환란은 바로 옆의 국가였었던 진秦 나라의 개입으로 인하여 중이가 왕에 오름으로써 끝이 나고 만다. 여기에 얽힌 이야기가 흥미롭다. 당시 진秦 나라의 왕은 패자 목공이었는데, 외국으로 망명한 중이에게 간단한 질문을 던진다. 그대를 곧 왕으로 만들어 주면 어떻겠소이까? 하지만 당시에 자신의 아버지인 헌공을 잃은 시기였었던 중이는 천륜을 어길 수 없다, 이런 혼란스러울때에 왕위에 오를 수 없다, 하여 고개를 가로젓는다. 하지만 동생인 이오는 중이와 다른 인물이었고 진 목공에게 만약에 자신이 왕이 된다면 진秦 나라에게 진晉나라의 성을 바치겠노라고 공언해버린다. 처음엔 중이를 왕위에 올리려 하였던 진 목공도 이오의 태도를 보고, 이오를 진晉나라의 왕에 올리는 것이 자신들 진秦 나라에 보탬이 되리라 여기고 이오를 왕위에 올리고 만다.

 

하지만 하늘이 정한 자는 결국에는 모든 난관을 거쳐 우뚝 천하에 서리라. 중이가 초나라에 망명할 당시 왕이었었던 초 성왕은 그들을 모조리 죽이라 주장을 하는 신하들에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야기한다. 중이는 어진 이이고, 하늘이 정한자이니 지금 죽이는 것은 천리에 맞지 아니한 것이다. 초 성왕이 그런 판단을 하게 된 것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그는 중이에게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만약에 그대가 왕이 되어 우리와 전쟁을 하게 된다면 그대는 우리에 어떤 보답을 할 것인가? 중이는 한참을 고민하고는 왕에게 이렇게 답한다 : 전쟁시 90리를 물러서겠습니다. 주위의 신하들은 저 중이는 매우 방자한 인물이고, 또한 위험한 인물이니까 당장 죽이라 간언하였지만 성왕은 호쾌한 웃음을 지으며 받아들인다. 결국 이 두 나라는 실제로 결전을 벌이게 되고, 진晉나라는 실제로 90리를 물러난 뒤 초나라를 패퇴시킨다.

 

우여곡절끝에 중이는 이오 - 진晉 혜공, 그리고 이오의 아들인 진晉 회공을 쫓아내고는 왕에 오른다. 여기까지는 좋았었지만 동시대 패자를 다툴 초 성왕은 매우 기세가 당당한 인물이었다. 당시에 패자의 자리에 오르려 했던 송 양공을 - 패자의 의미를 회맹을 주도하였다, 로 둔다면 송 양공을 패자로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송 양공을 패자의 하나로 본다. - 부상입혔고 결국 패자의 자리서 쫓아내었으며, 진秦 목공 다음의 가장 유력한 패자가 되리라 볼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성왕은 결국 진 문공, 중이에게는 패퇴를 당하고 만다. 여기서 90리를 물러난 약속이 실제론 계책이었다, 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 상대가 기세가 등등할 때에는 맞서 싸우지 않고, 상대의 기세가 수그러졌을때 공격을 하여 승리를 가져갔었다, 라고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이리라. 그 90리의 약속이 정말 진실된 마음때문에 지킨 것인지 계책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전쟁은 진晉문공을 패자로 만들게 되었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왜 진秦 목공은 진晉 나라의 혼란을 틈타 멸망시키지를 않았나? 상대의 혼란은 나에겐 득이다. 그러나 진秦 목공은 진晉 나라를 그대로 유지시켜주었다. 이는 파악컨대 두 가지로 이유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멸망시키는 것 보다 그대로 놓아두고 속국 비슷하게 만드는 것이 더 경제적으로 이득이라는 것을 진 목공이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라는 것이다. 치안과 정치 그리고 문화 등 귀찮은 부분은 그 나라 군주들에게 맡기고 경제적 알맹이들만 자신들에게 들어오도록 한다. 근대의 식민지 개념과 매우 유사하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경우에 백성의 불만도 그들의 군주들에게 돌아가버리니 민심을 잃을 가능성 자체도 낮다고 할 수 있겠다. 이를 위해서 진秦 목공이 이오를 왕위에 올린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진秦 목공이 실제로 그렇게 여겼었다면 그 전략은 실패로 돌아간 것 같다. 결국 이오는 진秦 목공을 배신하고는 신의를 지키지 않았고 때문에 진秦 목공에게는 큰 이득이 돌아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런 일을 겪고도 진秦 목공은 진晉 을 멸망시키지는 않았다.

 

결국 여기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춘추시대까지는 존왕양이의 이념이 강했다, 라고 말이다. 왕을 존중하면서 이민족들을 몰아내버린다. 그런데 진晉 나라는 사실 주 나라 왕실에 직접 토지를 받은 제후일지니 - 앞서 설명한 바에 따르면 진晉 의 국성國姓은 희씨로 주와 같은 성씨다. - 함부로 건드리지를 못했다, 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주가 직접 질서를 만들어 낸, 토지를 나눠준 진晉 이었기에 존왕양이의 기치를 가장 먼저 내세운 - 앞서 주가 이민족에게 공격받았을때 가장 먼저 군사를 내었다고 말했다. - 진秦 은 공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단순히 춘추시대는 상대를 멸망시킬 정도로 심하게 공격을 하지는 않는 시대였었다, 라고 본다면 진晉에게 멸망당한 괵같은 곳들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 것인가? 물론 여기에 반박은 있다. 괵나라 자체도 매우 높은 위계를 가지고 있는 나라였었다. 괵의 군주는 주 문왕의 자손의 나라였었다. 그렇다면 진이 괵을 멸망시켰던 것은 주 가 세운 질서를 무너뜨린 꼴이 되지 않겠나?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진 목공은 멸망을 시킬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라는 것이다. 실제로 한 국가가 외부의 침입을 받으면, 그때까지는 서로 내분을 일으키더라도 뭉치게 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진 목공은 공격을 통해서 멸망시키는 것을 중단하고는 이오를 밀어주었다. 아마도 그 당시 진 목공의 심정은 이 세 가지 중 어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진晉나라는 멸망하고 만다. (엄밀히 말하면 어느 정도의 명맥은 유지를 하고 있었지만, 사실상 멸망에 가깝다.) 왼쪽의 책 치도를 보면 멸망 당시의 진晉나라에 대한 흥미로운 일화가 나온다. 당시 진晉나라는 네 집안이 세력을 거의 나눠가지고 있었다. 지씨와 한씨, 위씨, 조씨가 바로 그들인데 가장 강력한 집안은 지씨였었고, 한씨와 위씨는 지씨의 가신들이나 다름없었다. 유일하게 조씨가 지씨의 패권에 도전했지만 지씨의 세력 앞에서 성 안으로 갇히고 만다. 그러나 조씨의 군주 조양자는 덕이 강한 인물이었고 성내의 백성들 모두 조양자와 함께 죽을 것을 각오하고 결사항전을 하니 도저히 점령할 수가 없었다. 물론 만약에 한씨와 위씨가 지씨를 열심히 도왔었다면 분명 결과가 있었겠으나 무력에 의한 겁박덕분에 도우고 있으니 어찌 전심을 바치겠는가. 그렇게 점차 지구전으로 상황이 흘러가던때에 지씨의 수장인 지백은 한씨의 수장 한강자와 위씨의 수장 위환자를 자신의 수레를 끌게 한 뒤 직접 전투 상황을 시찰하러 나갔다. 사실 지백의 머리속에는 이미 조양자는 안중에도 없었고, 승리한 다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지백의 입에서 무의식중에 말이 흘러나왔다. 여기 이 강물이 흐르는 곳은 어디인가, 라고. 그 말을 들은 한강자는 위환자를 팔꿈치로 툭 쳤다. 당시 지씨가 공격하고 있던 성의 근처에는 강물이 흐르고 있었고, 그 강물을 따라 나아가다보면 한씨의 영토까지도 다다랐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 강물을 따라 그대로 진군하여서 한씨마저도 멸망시켜야겠다, 라고 무의식중에 말한 것이나 다름 없었던 것이다. 이에 위환자는 한강자의 발등을 밟는 것으로 그 대답을 대신하였다. 한씨가 멸망한 다음에는 당연히 위씨다. 탐욕스러운 지백이 그들을 살려둘 리가 없을 것이니.

 

이윽고 조양자는 위환자와 한강자에게 밀서를 보내 지씨를 함께 멸망시키자고 말한다. 그리고 한, 조, 위, 세 가문은 힘을 합쳐 지씨를 모조리 죽이고 만다. 그 여세를 몰아 그대로 세 가문은 세 국가로 탈바꿈해버린다. 이를 두고 삼가분진이라는 말을 쓴다. 물론 진晉 자체는 이때까지만 하여도 이름은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모조리 세 국가 - 한, 조, 위 - 들에게 땅을 빼앗겨버리고 만다. 여기서 춘추시대는 막을 내리고 전국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만약에 주나라 왕실이 아직도 힘이 있었다, 라고 한다면 분명 한, 조, 위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분봉한 국가를 건드리지 말고 다시 진晉 으로 돌아가도록 하여라, 라고. 하지만 당시의 왕은 힘이 없었고 그대로 승인해버리고 만다. 이를 보고 다른 국가들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더이상 주나라는 힘이 없다. 이제 내가 나설 차례이리라, 라고.

 

진陳 나라에 대해서는 사실 그렇게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여기서 간단하게나마 언급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때문이다. 진陳 왕족이었던 진완은 제나라로 건나가 제나라를 자신의 나라로 만들어버리고 만다. 전국시대에 칠웅으로 자리를 잡았던 제나라는 바로 이 진陳씨의 제나라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바로 여기에도 매우 흥미로운 얽힌 이야기들이 있다.

 

진陳 나라의 건국은 주 무왕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주 무왕의 딸은 진陳 나라의 시조와 결혼을 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진陳 국가의 시작을 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결혼을 통하여 진陳이 제후국으로 발돋움하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진陳 은 계속 주위 나라들에게 시달렸었고, 업친데 덮친 격으로 내분까지도 일어나게 된다. 바로 후계자 문제다. 한 나라를 기업으로 보자면, 이 기업이 잘 유지되려면 후계를 잘 둬야 한다. 진陳 이라는 기업은 여기서 제대로 맞물리지가 않았다. 결국 후계구도에서 쫓겨난 완이라는 공자는 제 나라로 도망가버리고, 거기서 처음으로 진陳씨를 써서 자신을 진완이라고 칭했다. 그리고 이 진陳완은 제나라에서 착실히 일하여 전田땅을 하사받으니 이로써 전田완이라고도 불렸다. 전씨는 상공업에 계속 종사하였고 결국 제 내부에 깊숙히 뿌리를 내리게 된다. 결국 기회를 엿보던 전씨는 힘을 기른 뒤 제나라의 왕을 쫓아내고 왕위를 차지하고야 만다. 원래 제나라는 강태공을 시조로 하는 나라였지만 이를 기점으로 제나라는 전씨가 왕이 되었다. 이를 전田제라 일컫고 허수아비에 가까웠던 주나라 왕은 그대로 인정하고야 만다.

 

이제 이 긴 글의 결론을 내릴 때가 되었다. 사실 이 글의 제목인 '진나라가 몇 개 있었나?' 에 대한 정답은 세 개,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진軫 나라가 하나 더 있기는 하다. 진軫. 하지만 그야말로 기록에도 거의 없는 나라일테니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 나라 입장에서는 진나라가 너무 많다고 헷갈리겠지만 중국인 입장에서는 발음이 모두 제각각이기 때문에 헷갈릴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이 글의 질문 자체가 잘못된 질문일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여야 할 것은 진나라의 갯수 따위가 아니라 저 진나라들을 살아간 사람들 자체에 얽힌 이야기들이다. 춘추전국시대만큼 여러 나라들이 난립하고 이해득실을 따지며 여러 분야가 발달한 시대는 드물 것이다.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왜 중국이 결국엔 유럽에 따라잡히게 되었나, 에 결국엔 중국이 안정을 추구를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라는 해답을 내놓았었다. 이를 뒤집어 이야기하자면 만약에 계속된 분쟁이 있다면 그 분쟁에 참여한 국가들 모두는 계속 발전할 여지가 있다는 말이다. 우리 시대에 가장 무기가 발달한 시기는 1, 2차 세계 대전 때였다. 이런 분쟁은 물론 해가 되겠지만, 동시에 득을 줄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는 책 등을 통하여 굳이 전쟁을 겪지 않고도 그들의 정수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p.s. 여기선 여담인데, 나는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주장인 계속된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환경때문에 유럽이 중국을 앞서나가게 되었다, 라는 것에는 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물론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근거가 저것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중국은 진시황이후로 하나의 중국이라는 신념을 가질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물론 요순시대에 하나의 중국이 있었다지만 문헌의 이야기 뿐이다. 그 넓은 땅덩이 모두를 지배한 모습을 백성들 눈에 똑똑히 새겨준 때는 진시황때였으니까. 그래서 수많은 전쟁을 겪고도 결국엔 중국은 다시 하나로 돌아갈 수 있었으리라고 본다. 한 번 일어난 것은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다. 그리하여 중국사에서는 만성적 통일이 몇 번이고 일어나게 된다. 하지만 이는 사실 발전상으로 볼때는 가치중립적인 이야기이다. 다시 말해서, 통일 자체가 문제의 핵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장 우리 나라만 해도 북한과 끊임없이 분쟁 중이다. 하지만 우리 나라가 이 분쟁을 통해서 경제력이나 군사력에서 미국을 앞지를 수 있을까? 문제는 그 운용에 있다. 또한 하나의 중국, 그리고 통일이라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무엇을 대가로 치르더라도 다시 통일을 하려고 마음먹었을 것이다. 이런 목표하에서 일어나는 전쟁은 막연한 분열들에서 일어나는 전쟁보다는 훨씬 치열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훨씬 국가의 힘을 강하게 만들 것이다. 나는 청나라의 성군들, 그러니까 강희제에서 옹정제로 이어지고, 건륭제에서 마무리되는 그 시기에 유럽에 추월을 당하게 된 근본적 이유가 있으리라고 본다. 좀 더 말하자면, 나는 청나라가 만약에 좀 더 유연해졌다면 유럽을 도리어 앞지를 수 있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가지는 편이다.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만성적인 분열과 만성적인 안정이라는 유럽과 중국의 차이점에서 유럽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말이다.

 

p.s.2  다음엔 도교에 관한 이야기를 끄적여 볼까.. 생각 중이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야클 2013-07-21 11:39   좋아요 0 | URL
평소에 저도 궁금하던 부분인데, 엄청난 페이퍼로 정리해주셨네요.잘 읽었습니다 ^^

가연 2013-07-31 17:58   좋아요 0 | URL
어허허.. 감사합니다. 답이 매우 매우 매우 늦어버렸습니다

희선 2013-07-21 23:39   좋아요 0 | URL
陈 [chén]
(陳) 늘어놓을 진
1.[동사] 진열하다. 배열하다. 차려 놓다. 벌여 놓다.
2.[동사] 진술하다. 말하다.
3.[형용사] 낡다. 오래 되다.


晋 [jìn] (알파벳을 그대로 읽으면 진이지만 찐이라고 들리더군요)
(晉) 나아갈 진
1.[동사] 나아가다.
2.[동사] 오르다. 승급하다. 승진하다.
3.[명사][역사] (Jìn) 진나라. [주(周)대의 나라 이름. B.C.1106〜B.C.376년. 지금의 산시(山西)성·허베...


秦 [Qín] 친(발음을 들어보니 이렇더군요)
1.[명사] 주(周)대의 나라 이름.
2.[명사] 진(秦)나라. [B.C 221〜B.C 206년]
3.[명사] 산시(陕西)와 간쑤(甘肃) 일대의 지역.



轸 [zhěn]
(軫) 수레뒤턱나무 진
1.[명사][문어] 수레뒤턱나무. [고대의, 수레 하부의 사방으로 가로지르는 횡목]
2.[명사][문어] 수레.
3.[명사][천문] 진수(軫宿). [이십팔수(二十八宿)의 하나]



중국어 사전에 한자를 넣어보니 이렇게 나왔습니다(중국식 한자인 간체자는 작게 보이죠 그냥 뒀습니다) 모두 발음이 다르군요(陳 첸, 晉 찐, 秦 친) 요즘은 한자 그대로 읽지 않고 중국말로 하게 됐잖아요 이 나라 발음도 그렇게 바뀌어야 하지 않을지... 이렇게 말하지만 예전에 한자음으로 읽은 것과 다시 중국말로 했을 때 다른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게 뭐였는지는 떠오르지 않습니다^^

전쟁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아주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나라를 하나로 만들려 한다지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할지라도... 예전에는 유럽이 중국을 앞질렀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중국이 앞지르려 하고 있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아직 이런저런 문제가 있지만... 그리고 우리나라도 중국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죠 책이 많이 나오고 있고, 중국말을 배우려고 하는 사람도 많을 것 같군요 저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할 뿐이지만...^^

진나라, 그냥 이 이름만 알고 있었는데 많이 있었군요 중국말로는 다르지만... 주 유왕이 한 일은 조금 웃기는군요 왕이 여자를 웃기기 위해서 그런 일을...

역사 왜곡은 그만했으면... 우리나라가 거기에 잘 대응해야 하지만...


희선

가연 2013-07-31 18:00   좋아요 0 | URL
맞아요, 모두 발음이 다릅니다. 위의 진시황 평전에도 Qin이라고 나와있습니다. 그나저나 중국어 사전을 찾아보시다니.. 대단한 학구열이신데요ㅎㅎㅎ

동북공정은 끊이지 않지요, 우리나라의 역사를 편입시키려는 움직임들도 있으니. 그래서 도리어 더욱 중국 역사에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조금씩 합니다

2013-07-28 2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31 18: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8-04 0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8-05 0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