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뒷모습 안규철의 내 이야기로 그린 그림 2
안규철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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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는 읽을 책이 산처럼 쌓여 있는데도 참새가 방앗간 못 지나가듯 도서관은 뻔질나게 찾게 된다. 말하자면 병이다. 병도 중병이라고 하겠다. 이러다 보니 구매한 책과 빌린 책이 뒤섞여 도무지 정리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반납 날짜가 임박하였다는 도서관의 카톡 문자를 받고서야 비로소 대출 도서를 찾느라 서재를 한바탕 뒤집어놓는 통에 책은 늘 여기저기 널브러진 채로 주인을 맞는다. 이따금 손님이라도 올라치면 집이 벼락이라도 맞았느냐며 어지러운 집안 풍경을 빗대어 놀리곤 한다. 그런 말이 듣기 싫었던 나는 큰맘 먹고 책정리에 나서기도 하지만 정돈된 모습도 잠시일 뿐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곤 한다. 내가 '엔트로피의 법칙'을 확고하게 믿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물건들이 제자리에 없다.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것들은 잠시만 눈을 떼면 엉뚱한 곳에 가 있거나 아예 사라져버리곤 했다. 나와 함께하는 삶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일까, 틈만 나면 다른 자리를 알아보러 다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적어도 주인에 대한 복무 외의 나머지 시간에는 자신들만의 삶을 살기로 작정들을 한 것 같다. 하여간 그것들은 찾으면 없다. 급하게 필요할 때일수록 더 그렇다. 안경, 열쇠 꾸러미, 지갑, 휴대전화만 그런 것이 아니라, 책꽂이의 책들과 작업실의 오만 가지 도구들, 얼마 전에 적어둔 메모들, 아껴두었던 기억들마저 다 한통속으로 그 모양이다."  (p.39)


안규철의 에세이 <사물의 뒷모습>의 한 대목을 읽으면서 이런 고민이 나에게만 국한되는 문제는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에 저으기 안심이 되었었다. 나는 사실 이 책 <사물의 뒷모습>을 페이지의 순서에 상관없이 짬이 날 때마다 야금야금 아껴가며 읽었다. 그렇다 보니 어떤 부분은 두 번 혹은 서너 번씩 읽기도 했고, 또 어떤 부분은 건너뛰듯 후루룩 급하게 읽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는 리뷰를 쓰는 일은 마냥 미루고 말았다. 무작정 뒤로 미루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리뷰를 쓴다는 건 책과의 영원한 결별 혹은 복잡한 내 서재의 어느 귀퉁이에서 언제일지도 모르는, 적어도 나와의 눈 맞춤이 있기 전까지는 표지 가득 먼지만 쌓아가야 하는 신세를 면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런 신세로 전락하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두고 싶었던 마음, 그게 뭔지는 나로서도 알 길이 없다.


"나에게도 나무처럼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수많은 가지들이 있다. 그것들 중에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정하고 잘라낼 것과 살릴 것을 정해야 한다. 생각처럼 잘되지는 않지만, 나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버릴 것을 버리는 나무의 결단을 배워야 한다. 나무가 된다는 것은 한곳에 자리 잡고 무슨 일이 일어나기만을 마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나무의 미덕은 인내와 여유로움만이 아니다. 치열한 자기성찰과 말 없는 실천에 나무의 미덕이 있다."  (p.80)


언젠가 나는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어떤 놀라운 발견이나 깨달음을 안겨주는 작가의 글을 읽었다 할지라도 "어머, 어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하고 감탄하며 경원시하거나 어떤 작가의 글이 나의 생각과 매우 비슷하다고 할지라도 "어머, 어쩜 내 생각을 이렇게 베껴놓은 듯 똑같을까!" 하고 동일시하지 않아야 작가를 더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물론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 생각한다면 나날이 증가하는 '덕후'는 아예 생겨나지도 않겠지만 말이다. 나는 다만 그런 놀라운 작가의 글을 만날지라도 그저 담담하게 '아, 이 사람은 세상을 이렇게 바라보는구나.' 하는 정도로 가볍게 여기기로 했을 뿐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뭔가 대단한 것을 발견하고, 뭔가 대단한 것을 깨닫는 법이니까. 다만 그것이 글이나 다른 예술의 형태로 세상에 알려지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만 존재할 뿐.


"무슨 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일이 어떻게 끝날지를, 그 일의 반대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멈추는 법을, 말하기 위해서는 침묵하는 법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잊는 법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외로움을 견디는 법을 알아야 한다. 문제는 우리가 앞으로 가는 방법만을 배웠지 멈추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뭔가를 이루고 소유하는 방법만을 배웠지 그것과 헤어지는 방법은 배우지 못했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방법만을 배웠지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방법은 배우지 못했다. 그러므로 지금은 다시 멈춰야 하는 시간, 우리가 배우지 않았던 것들을 위해 지평선 너머를 응시해야 하는 시간이다."  (p.224~p.225)


어제부터 내리는 장맛비가 날짜를 달리 한 오늘도 끊임없이 내린다. 눅눅한 습기가 방안 구석구석을 떠돌다가 사람의 시선이 닿지 않는 어느 곳에 불쑥 곰팡이를 피울 것 같은 토요일 오전의 멍한 시간. 나는 배고픔도 잊은 채 컴퓨터 앞에 앉아 리뷰를 쓴다. 이렇게 멍한 정신으로 어떤 좋은 글이 나올까마는 나는 그와 같은 일말의 기대감도 없이 다음에 해야 할 일에 손을 대기 전에 우선 이 글을 매조지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는 생각만 불현듯 들었던 것이다. 장맛비는 여전히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고 끼니 대신 눅눅한 습기만 잔뜩 흡입한 탓인지 배고픔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뭔가 잘못되었는지도 모른다. 나의 감각에 이상이 있는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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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코앞이라는데 하늘은 여전히 맑고 화창합니다. 찌는 듯한 더위에 몇 걸음만 걸어도 땀이 쏟아지는 오후,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이 없었더라면 숨이 턱턱 막히지 않을까 싶은 날씨입니다. 벚나무의 우듬지에도 올봄 새로 돋은 잎들이 시들시들 말라갑니다. 쏟아지는 햇살의 열기를 이기지 못한 탓일 테지요.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여름을 대비합니다. 분위기 좋은 카페에 들러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퇴근 후 어스름이 지는 저녁나절, 뜻이 맞는 사람들 몇몇이 모여 달리기를 하며 무더위에 맞서기도 합니다. 이런저런 사람들을 아우르며 여름은 한껏 부풀어 갑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신체뿐만 아니라 우리의 정신에도 장애가 존재합니다. 정신의 장애는 현대인에게 있어 아주 깊고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까닭에 우리 대부분은 아마도 정신적 장애인에 속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개개인별로 장애의 경중은 차이가 나겠지만 말입니다. 신체의 장애는 전적으로 한 개인에 속하는 문제이므로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미미한 편입니다. 그러나 정신적 장애는 타인과의 관계, 이를테면 사회적 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까닭에 한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있어 정신적 장애는 신체적 장애보다 더 큰 문제로 작용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스갯소리이지만 나는 지인이나 회사 동료들에게 요즘 유행하는 MBTI 검사를 일러 '정신장애 판정표'라고 부르곤 합니다. 말하자면 MBTI 검사는 정신적 장애를 판정하는 요소를 유형별로 모아 어떤 부분에 장애가 있는지를 알려주는 기준표인 셈이지요. 그것이 아주 정확하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말입니다. 사회가 개인 단위로 쪼개지면 쪼개질수록 장애의 정도는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 우리의 선조들이 부락 단위로 공동체를 꾸려 평생을 그들과 함께 살아가던 시절에는 개개인이 경험하는 정신적 장애 수준은 매우 낮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주 어린 시기부터 독립(고립에 가깝다고 말하고 싶지만)을 경험하는 현대인들에게 정신적 장애는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질병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죽음에 이르는 병>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이해될 듯합니다.


주변에서 애완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당연한 결과이겠지요. 사회적 관계에 있어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서로에 대한 신뢰를 확인하고 그들로부터 위로와 격려를 받는다는 건 힘든 일일 테니까 말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에 대한 신뢰가 사라지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정신적 장애의 등급에 상관없이 인간을 무작정 따르는 애완동물에게 애정을 보이는 것은 인지상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상하게도 애완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은 대개 일반인보다 고집이 세고, 자기주장이 강하며, 타인을 자신의 뜻대로 부리고자 하는 성격의 유형인 경우가 많습니다. 내 주변의 사람들만 그런가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좋게 말하면 리더십이 강한 사람들이지요. 그러나 공동체 생활에서 자신의 위치가 그에 미치지 못할 경우에는 정신적으로 늘 피폐하거나 분노와 스트레스가 쌓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인간관계에서 오는 긴장과 스트레스는 애완동물과의 관계에서는 있을 수 없겠지요. 그렇다고 우리가 겪는 정신적 장애가 고쳐지는 것은 아닐 듯합니다. 사회가 고도로 발달할수록 결혼을 선택하는 사람이 적어지는 까닭도 같은 이유일 듯합니다. 정신적 장애를 겪는 사람이 같은 사람과 몇십 년 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테니까 말입니다.


정신적 장애가 비록 계절적 질병은 아니지만 무더운 여름철에는 타인에 대한 배려나 인내심이 조금쯤 감소하여 나의 장애 정도가 더욱 도드라지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정신과 의사로부터 장애 판정을 받은 바 없지만 나 역시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 중 한 사람으로서 정신적 장애인임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타인에게 짜증을 내기 쉬운 여름철, 나의 장애 등급을 낮추기 위해(겉보기에 낮아 보이도록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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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게 평화를 묻다 -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연구
서보혁 외 지음 / 모시는사람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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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도 그렇지만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사회에서는 특히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격언이 수시로 입증되곤 한다. 냉혹한 현실이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비근한 예로 오랜 기간 알카에다 시리아 지부를 이끌었던 알샤라만 하더라도 한때 미국 정부에 의해 140억 원의 현상금까지 걸렸던 요주의 대상이었지만, 아사드 정권을 무너뜨린 후 알샤라에 대한 현상금이 철회된 것은 물론 그가 이끄는 과도정부로 인해 시리아에 대한 경제제재를 철회하고 경제협력을 강화하기 위한 정상회담이 열리기도 했다. 그와 같은 사례는 비단 시리아에서 그치지는 않는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식을 원하는 트럼프가 자신의 의견에 따르지 않는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대통령을 기자단이 보는 앞에서 심하게 면박을 주는 장면을 우리는 똑똑히 지켜본 바 있다.


비정한 국제사회의 현실에 비해 대한민국 국민의 정서는 사뭇 낭만적인 측면이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초강대국 미국이 대한민국의 국내 정치에 개입하여 자신이 믿는 정당에 유리하게 힘을 써줄 것이라는 믿음, 우리나라와는 관련도 없는 이스라엘이 미국과 함께 자신들의 편에 서줄 것이라는 믿음은 한 손엔 성조기를 또 다른 한 손에는 이스라엘 국기를 들고 광화문 광장에 나서도록 했으니 말이다. 이처럼 순진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 탓에 나는 이따금 서울에 거주하는 외국 친구들로부터 이와 관련한 질문을 종종 받곤 한다. 시위에 나서는 사람들이 왜 성조기나 이스라엘 국기를 들고 나오느냐는 질문. 나는 그들에게 장황한 설명을 할 자신이 없다. 그렇다고 우리 국민이 무식해서 그렇다고 대답하자니 자존심이 상하고. 나는 그저 나도 잘 모르겠다는 대답으로 얼버무리곤 한다.


"이 책은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의 배경, 의미, 상황, 종전을 위한 대안 등을 정치, 사회, 종교, 역사, 법률, 생태, 젠더 등 대부분의 영역을 망라해 다룬, 적어도 한국에서는 선구적인 책이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이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 대한 균형 잡힌 지침서가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모든 필자가 평화 지향적 연구자들이라는 점에서 상대적 약자이자 이 전쟁에서 더 큰 피해를 입고 있는 팔레스타인 주민의 아픔에 대한 공감이 더 크게 나타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이 책의 한계일지도 모른다."  (p.288)


서보혁 통일영구원 선임연구위원, 허지영 강원대학교 통일강원연구원 연구교수, 이찬수 카톨릭대학교 강사 등이 공동 집필한 <전쟁에게 평화를 묻다>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을 입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책이지만, 집필진의 논조나 주장이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사실 이 전쟁은 2023년 10월 7일 하마스의 이스라엘에 대한 대규모 로켓 공격에서 시작되었지만, 네타냐후를 비롯한 이스라엘 시온주의자들이 팔레스타인 주민에 대해 펼치는 인종청소는 도를 넘고 있다. 그런 까닭에 영국은 이스라엘과의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중단하였고, 튀르키예는 이스라엘과의 교역을 전면 중단하였으며, 콜롬비아를 비롯한 남미 3개국은 이스라엘과의 단교를 선언했다. 유럽연합(EU) 역시 자유무역협정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대중의 생존에 필수적인 물과 전기를 이스라엘 측이 공급을 차단하고, 식량.의약품.연료의 반입을 금지했습니다. 이로 인해 주민들은 굶주림과 질병, 기아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피폐한 삶은 이번 전쟁에 의해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지난 16년간 지속된 봉쇄로 가자 지구는 사실상 사람이 살 수 없는 환경이 되었으며, 주민들은 떠날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그 결과 가자는 굶주림, 고통, 죽음이 매 순간 일어나는 생존 불가능 지역으로 전락하였습니다."  (p.26~p.27)


내가 이 책을 읽고 싶었던 단 하나의 이유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현실에서 적어도 학자는, 또는 여론을 주도해야 하는 언론인은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강한 목소리를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개가 그렇듯 '혹시나' 했던 기대는 '역시나'로 끝나고 말았다. 2025년 5월 13일 가자 지구의 하마스 정부 지도자였던 무함마드 신와르가 이스라엘의 폭격에 의해 사망했음을 공식적으로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군의 민간인 학살이 멈추지 않고 있는 현실을 뻔히 보고 있음에도 말이다. 물론 이 책이 쓰일 당시에는 신와르가 사망하기 전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서 희생된 사람의 대다수가 여성이나 어린이, 노인과 같은 약자에 집중되었다는 것을 상기할 때 학자적 양심이라면, 언론인의 양심이 존재한다면 이스라엘에 대해 강한 어조로 비난하는 게 옳다고 본다.


"가자 제노사이드의 경우, 이와 같은 변화된 국제 정세에 더해, 오랜 시간 미국과 유럽의 지원과 협력으로 이루어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봉쇄와 학살의 연장선에 있었기에 더더욱 기존의 국제 질서가 학살을 막는 데 온전히 작동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여러 국제기구들은 나름의 결정과 판단으로 가자 제노사이드를 비판했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확인해 신속하게 공표했다. 그 중심에 국제재판소가 있었다."  (p.162)


오늘(2025년 6월 13일)은 이란 핵시설 등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습이 있었다. 이란과 미국의 핵협상도 결렬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물론 이스라엘의 이와 같은 불법적 도발은 다방면에서 위기에 처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도를 끌어올리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수도 있지만 인간의 생명을 파리 목숨쯤으로 생각하는 시온주의자들의 잔인성에 기초한다고 보인다. 그들이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한 이스라엘은 전 세계인의 공적이 될 수밖에 없으며,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그에 상응하는 죄의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쟁에게 평화를 묻다>는 중동 지역의 평화를 기원하는 책인 동시에 정의와 인도주의에 대한 세계인의 각성을 요구하는 책이다. 나는 그렇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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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식당 근처의 공원을 친구와 천천히 걸었다. 소화도 시킬 겸 겸사겸사 나선 산책이었지만 부쩍 높아진 기온 탓에 걸음은 마냥 느려졌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구름이 많은 하늘이 여름 햇살을 조금쯤 가려주었다는 것. 그 시간에도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아주 없지는 않아서 버찌가 까맣게 떨어진 산책로를 많은 이들이 밟고 지나갔다. 심술궂은 바람이 이따금 잊을 만하면 불곤 했다.


새 정부가 들어선 지 일주일여가 지나고 있다. 그럼에도 주변 분위기는 많이 바뀐 듯하다. 뭐랄까, 전에 비해 생기가 돈다고 할까. 확실히 식당이나 카페 등 가게를 찾는 손님들이 많아졌음은 물론 손님들의 표정도 밝아진 듯하다.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나 새 정부에 거는 기대가 크다는 건 확실히 느낄 수 있다. 이렇다 보니 이전 정부는 도대체 뭘 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한 지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경제가 살아날 조짐을 보이는데 지난 정부는 3년 동안 도대체 뭘 했으며, 대통령은 어떤 역할을 했던 것일까. 밤낮 부어라 마셔라 술이나 처먹고, 국정운영은 나 몰라라 하면서 세금만 축냈던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아니 들 수 없다. 안규철의 저서 <사물의 뒷모습>을 시간이 날 때마다 아껴가며 읽고 있다.


"말에도 유효기간이라는 게 있다. 날짜가 지난 신문기사는 뉴스로서의 의미를 잃고, 때를 놓친 뒤늦은 사과는 진정성을 의심받는다. 낡은 구호는 비웃음을 살 뿐이고, 상투적인 은유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물론 한 사람에게 일생 동안 변함없이 유효한 말도 있고, 개인과 세대를 넘어 인류의 삶에 빛이 되는 말들도 있지만, 세상에는 그렇지 않은 말들, 더 이상 유효하지 않으며, 할수록 해가 되는 말들이 더 많다. 오염되어 더 이상 쓸 수 없는 말이 있고, 닳고 닳아서 원래 의미를 잃어버린 말이 있고, 오랫동안 쓰이지 않아서 아무도 기억 못 하는 말이 있다. 진실을 감추고 왜곡하는 데 쓰이는 말이 있고, 사람을 현혹하거나 무너뜨리는 데 쓰이는 말이 있다. 그렇다고 이런 말들을 죄다 쓸어 모아서 쓰레기장에 버리거나 땅에 묻을 수는 없다. 그렇게 하더라도 그것들은 다른 어딘가에서 버젓이 쓰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감쪽같이 포장을 바꿔 다시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유효기간이 지난 죽은 말들이 돌아다니는 세상에서 말은 믿을 수 없는 것이 된다."  (p.137~p.138)


지난 정부에서 여러 차례 거부권이 행사되었던 3개의 특검법이 오늘 의결되었다. 지난 정부의 대통령은 자신과 부인의 잘못에 대해 사과를 한 적도 거의 없지만, 어쩌다 하는 사과 역시 '진실을 감추고 왜곡하는 데 쓰이는 말'이 대부분이었다. 그와 같은 말들을 '죄다 쓸어 모아서 쓰레기장에 버리거나 땅에 묻을 수는 없'지만 특검을 통해 낱낱이 드러내고, 그에 상응하는 죄의 대가를 받도록 했으면 좋겠다. 오늘은 제38주년 6.10 민주항쟁 기념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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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손턴 와일더 지음, 정해영 옮김, 신형철 해제 / 클레이하우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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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산에는 비릿하고 은근한 밤꽃이 피어나고 있다. 자연의 섭리는 때론 놀라운 데가 있어서 초봄에 피는 꽃들은 향기가 거의 없거나 있어도 숲 속의 다른 생물을 자극하지 않는다.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많은 동식물의 수면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산수유꽃, 벚꽃 등 봄을 알리는 꽃들이 금세 피었다 지는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봄이 여러 봄꽃들이 경쟁하듯 피어날 즈음이 되면 그 향기도 덩달아 짙어지게 마련이다. 조팝꽃이며, 아카시아꽃이며 심지어 찔레꽃에 이르기까지 이 시기의 꽃들은 꽃의 화려함보다는 자신의 향기로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러나 향기는 멀리 가지 못하고 그저 주변의 동식물을 각성시키고, 방금 겨울잠에서 깬 어리둥절 정신을 차리지 못한 숲의 생물들의 머리를 맑게 할 뿐이다. 흐드러진 봄이 여름으로 넘어갈 무렵, 서둘러 밤꽃이 핀다. 밤꽃은 그저 가벼운 향기로 주변 동식물을 희롱하지 않는다. 밤꽃의 향기는 숲 전체에 스며든다. 그렇다. 밤꽃 향기는 스치듯 풍기지 않고 내재한 생명력을 숲 전체에 전한다. 그렇게 천천히 스며들어 장마가 오고 이따금 태풍이 불더라도 늦지 않고 생명력을 퍼뜨리라고 주문한다.


"때로는 온종일 그런 기도와 탄원에 미친 듯 매달리다가 돌연 환멸에 휩싸이곤 했다. 자연은 귀머거리다. 신은 무심하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절대 섭리를 바꿀 수 없다. 그러다가 절망감이 현기증을 불러오면, 아무 길모퉁이에서 발을 멈추고 벽에 몸을 기댄 채 계획 따윈 없는 이 세상을 어서 하직하기를 갈망했다."  (p.61)


숲에서는 신의 의도와 자연의 섭리를 이해하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다. 자연스럽다는 말은 사랑스럽다는 말의 의미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이치를 담은 소설이 손턴 와일더가 쓴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이다. '1747년 7월 20일 금요일 정오, 페루에서 가장 멋진 다리가 무너지며 다섯 명의 여행자가 그 아래의 골짜기로 추락했다.'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이 사고를 목격한 이탈리아 북부 출신의 한 수사에 의해 탐구됨으로써 희생된 다섯 명의 삶이 새롭게 조망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희생자들의 삶의 궤적을 연구함으로써 감춰진 '신의 의도'를 밝히고자 했던 주니퍼 수사. 그러나 주니퍼 수사는 죽음 이전에 있었던 희생자들의 삶이 그들이 저질렀던 크고 작은 과오와 이에 대한 반성 그리고 앞으로의 삶에 대한 새로운 결심으로 이루어져 있었음을 밝혀냄으로써 '신의 의도'와는 크게 상관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른다.


"여기서 주니퍼 수사가 이끌어 낸 귀납적 결론들을 굳이 자세히 소개하지는 않겠다. 그것은 늘 우리 곁에 있는 것들이다. 그는 그 사고에서 악한 사람에게 파멸이 닥친 것과 선한 사람이 일찍 천국의 부름을 받은 것을 모두 보았다고 생각했다. 세상을 향한 객관적인 교훈으로, 오만함과 부유함이 저주받는 것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리마의 교화를 위해, 겸손함이 최고로 인정받고 보상받는 것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니퍼 수사는 자신의 추론에 만족할 수 없었다. 몬테마요르 후작 부인이 탐욕의 괴물이 아니고, 피오 아저씨가 방종의 괴물이 아닐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p.193)


누군가로부터의 사랑을 갈구하다 끝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듯한 다섯 명의 희생자들. 그렇다면 그들의 삶은 그저 무의미한 것이었을까. 게다가 이 사고의 희생자들을 통해 '신의 의도'를 밝히고자 했던 주니퍼 수사 역시 이단으로 몰려 화형을 선고받게 되는데, 삶에서 경험하는 그 모든 것들이 결국 예기치 못한 죽음과 함께 무의미의 늪으로 영원히 가라앉는 것일까. 당연하게도 작가는 이를 부정한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잇는 다리가 '사랑'이라는 것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킨다. 죽은 자를 기억하는 단 몇 사람의 사랑과 기억만으로도 우리는 이 세상을 살다 갈 의미와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모든 사랑의 충동은 그것을 만들어 낸 사랑으로 돌아간다. 사랑을 위해서는 기억조차 필요하지 않다. 산 자들의 땅과 죽은 자들의 땅이 있고, 그 둘을 잇는 다리가 바로 사랑이다. 오직 사랑만이 남는다. 오직 사랑만이 의미를 지닌다."  (p.207)


지금 이 순간을 딛고 있는 '시간의 다리'는 과연 안전한가. 확실히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그 누구도 이 질문에 '예스'라고 말할 수 없으리라. 우리 모두는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산루이스 레이의 다리' 위에 서 있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내일을 향해 두려움 없이 나아갈 수 있는 까닭은 나를 사랑하고 믿어줄 몇몇 사람들이 나의 뒤를 받쳐 주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 이후에도 그 사랑의 끈이 끊어지지 않고 한동안 이어질 수 있음을 확신하는 사람은 지금의 이 삶에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산에는 요즘 밤꽃의 생명력이 퍼져가고 있다. 내일 당장 태풍이 몰아친다 한들 숲에 번지는 그 생명력은 멈추지 않고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우리는 다시 기운을 내고 지친 당신의 어깨를 다독일 수 있다. 한낮을 달구는 유월의 무더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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