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호칭 (마리몬드 리커버 한정판) 문학동네 시인선 18
이은규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가을이면 무작정 '시'를 읽어야 한다. 마음에 빨강, 노랑, 갈색으로 단풍이 들 때까지 우리 언어의 묵은 때를 '시'라는 목욕 타올로 한 꺼풀 각질을 벗겨내듯 씻어내면 개벽을 하듯 새로운 세상이 짠 하고 우리 앞에 펼쳐지지 않을까? '시'는 타락한 언어, 생명이 다한 일상 언어의 가장 민감한 겨드랑이를 한참이나 간지른다. 나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은 채 새로운 언어로 웃는다. '시'가 안내하는 축제의 현장에서 사람들은 가벼운 미소와 침묵으로 소통한다. 외침이 오히려 고요가 되는 세계. 오직 '시'를 읽음으로써 다다를 수 있는 그곳을 향해 가을엔 무작정 '시'를 읽어야 한다.

 

이은규 시인의 시집 <다정한 호칭>은 가을을 위한 '시'로 가득하다. '그때의 바람은 어디에 있나/생의 무늬를 남기지 않은 채/이제는 없는, 당신이라는 바람의 행방을 묻는다.'('바람의 지문' 중에서)는 시인의 고백은 차라리 처연하다. 그리움은 바람을 닮은 투명한 울림이 되고, 울림은 순식간에 '나'와 '현실'을 지운다. 삶이 그저 허허로운 바람이 되고, 회오리의 거센 격랑도 그저 담담하다. '다가올 문장들이 기록된 문장들의 주석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시인은 말한다.

 

제 삶을 오롯이 사는 사람이 태어나서 한번쯤 시인이지 않았던 적이 있을까마는 시인이었던 과거가 아득한 과거의 일인 양 골방 깊숙이 숨겨두었던 그리움의 한 쪽, 어린 시절의 망막. 일상의 켜켜이 쌓인 먼지는 시인이었던 '나'를 잊게 한다. 시인은 '희망이 가장 나중에 죽는다는 말을 의심해보기로 한다'며 '나'의 의지를 묻는다. 사랑이 죽고, 희망이 죽고, '죽음보다 더 나은 것들을 발견할 수 있을까' 의심하게 되는 지금은 가을, 부인할 수 없는 계절.

 

역방향으로 흐르는 책

 

바람은 종종 없을 대답을 휘게 한다

모든 게 순리라는 순간의 뒷말을 믿어, 믿지 마

치장된 위로 앞에서 방향을 잃는 것들

 

방향에 대한 구름의 감각을 오래 부러워한 종족이 있다

 

역방향의 기차는

거꾸로 읽기 시작한 책 속의 문장처럼 낯설게 좋다

독법에 의해 내용이 달라지는

 

왜 당신의 책을 거꾸로 읽고 싶었을까

마지막 장에 찍힌 쉼표

마침표 대신 쉼표 쪽으로 휘어져 있음을 알겠다

끝 문장으로 첫 문장을 되묻는

 

이번 생도 도돌이표의 구름이 되어 오래 흐르겠다

 

기차는 두 방향으로 충실하고

순방향이 먼저 보고 놓아버린 구름들을

역방향의 얼굴이 거둔다

방향 없이 구름은 다만 흐를 뿐

속도에 찢긴 한 점, 꽃의 붉음이 허공에 덧발라진다

 

먼저 부를 수 없는 허공을 가진 꽃처럼

먼저 부를 수 없는 당신의 시는 거꾸로 읽기 알맞다

즐거운 난독에 시달리다 잠시 책을 덮는 오후

바람만이 무릎 위의 문장들을 읽다 간다

 

구름에게 묻는 정착지의 기후는 어떨까

목적지는 다만 정착의 한순간일 뿐

모든 게 순리라는 위로와 결별하기 좋은 오후

 

끝 문장의 쉼표는 첫 문장 마침표의 도돌이표

 

언제 벗겨질지 기약도 없는 미세먼지의 습격에 속수무책으로 널부러졌던 오늘. 희뿌연 먼지 사이로 붉고, 노랗고, 푸르른 계절이 멀찍이서 서성였다. 내가 부르는 '다정한 호칭'. "아, 가을!" 가을에는 무작정 '시'를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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