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만 하루를 생각할 뿐이다. '겨우'라고 말할 수도 있으려나. 사는 게 칙칙하다거나 어둡다거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것에 잘도 색을 입히지만 나는 그마저도 귀찮거나 따분하거나 떨떠름할 뿐이다. 그저 하루가 가고 습관처럼 계절이 오가는 어느 순간에 하늘 한 번 올려다 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나른한 오후다. 쌀쌀했던 아침 기온이 무색해지는.

 

오래전에 읽었던 책들을 다시 읽고 있다. 생텍쥐페리의 '인간의 대지'나 '남방우편기', '어린왕자'를 읽었고, 레마르크의 '서부 전선 이상 없다'를 읽는 중이다. 적어도 한두 번, 때로는 족히 서너 번은 읽었을 책들인데 지금 내 기억에 남은 것은 많지 않다. 새삼스럽다. 사람의 기억은 믿을 게 못 된다는 걸 재차 확인하면서도 나는 또 번번이 속는다. 그야말로 무의미의 축제다. 별 의미도 없는 짓을 또다시 반복하고, 반복하고 반복하다 또다시 잊기도 하고...

 

다시 읽는 책의 줄거리는 도외시한 채 낱낱의 문장에만 집중하다 보면 작가 개개인의 노력에 감탄하게 된다. 사는 게 이만큼 힘들었구나, 하는 대견한 생각도 하게 되고. 누군가의 노력을 곁에서 지켜보거나 세세히 음미하지 않은 채 그 결과만을 놓고 보면 세상에는 그닥 감탄할 일이 많지 않다. 한 톨의 쌀을 생산하기 위해 여름내 애썼을 어느 농부의 노력이나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수 년 혹은 평생을 보냈을 어느 작가의 불면. 다시 읽는 책의 면면에서 내가 새로이 얻은 게 있다면 그들의 땀냄새이다.

 

긴 연휴를 맞는 사람들의 표정이 어쩌면 저리 어두울까. 아직 오지도 않은 일을 제멋대로 상상하고 고민하고 나름 우울을 가장하는 걸 보면 삶은 결국 맹목적인 행위의 총합이 아닐까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래도 아무튼 민족 최대의 명절 추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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