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송맨송한 기분이 영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날이 있다. 낮에 딱히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 것도 아니고, 며칠째 말 못할 고민으로 전전긍긍 시달려 온 것도 아닌데 오늘 밤은 왠지 똘망똘망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드는 것이다. 나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지 않은가. 그런 예감이 드는 날에는 나는 사소한 것에 괜한 만용을 부리느니 맨송맨송한 기분을 잠재울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곤 한다. 새가슴이라고 놀려도 어쩔 수 없다.(정말 그렇게 놀린다면 물론 곤란하겠지만)

 

더위가 기승을 부렸던 어젯저녁도 나는 그런 께름칙한 기분에 휩싸여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다. 술 한잔 하자고 꼬이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사람이 서넛 있지만 술을 못하는 나는 그 방법을 써먹을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우리 저녁에 차나 한 잔 할까?" 넌지시 말을 건네면 나에게 다른 뜻이 있구나, 의심할 게 너무도 뻔했다. 그런데 웬걸, 내가 말도 꺼내기 전에 친구 한 명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대뜸 저녁에 선약이 있느냐 묻더니만 미처 대답도 끝나기 전에 차나 한 잔 하자고 했다. 미리 생각을 해두었던지 약속장소까지 일사천리로 말해버렸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사흘에 피죽 한 그릇도 못 먹은 사람처럼 기운이 없어보였다.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 탓에 나는 흑기사 한 명을 대동해야겠구나, 생각했다. 내가 고민이 있을 때 이따금 전화를 거는 분에게 연락을 했더니 마침 시간이 된다고 했다. 나에게 전화를 했던 친구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친구는 지난해에 아내와 이혼을 하고 그의 부모님댁에 들어가 고등학생인 딸과 함께 살고 있는 까닭에 말 못할 고민도, 털어놓고 싶은 문제도 많을 터였다.

 

친구의 하소연은 길게 이어졌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나의 흑기사는 "자네만 인생 두 번 사는 게 아닌데 뭘 그렇게 징징거리나. 세상을 산다는 건 누구나 자네만큼 힘든 법일세. 다만 말을 하지 않을 뿐이지."라고 말했다. 그분을 잘 모르는 타인이 들었더라면 야멸찬 사람이구나 비난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와 친구는 그분의 성정을 잘 아는 터라 그분이 진심으로 친구의 사정을 아파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우리와 헤어져 댁으로 돌아가서도 밤새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때로는 겉으로 보이는 게 다는 아니다. 어깨가 축 늘어진 채 귀가했던 나는 더위도 잊고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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