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독서 - 완벽히 홀로 서는 시간
김진애 지음 / 다산북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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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대한 담론은 언제 읽어도 재미있다. 내게 있어 그것은 일종의 치유가 불가능한 병이다. '다시는 이런 책을 읽지 말아야지.' 생각하면서도 그때뿐이다. 옷을 좋아하는 사람이 백화점의 의류 코너를 돌며 새로 산 옷을 두 손 가득 든 채 '다시는 오지 말아야지.' 결심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나 또한 책을 다 읽은 후에 새로 살 책의 목록을 빼곡히 기록한 후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구매 버튼을 누르기 때문이다.

 

책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분야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책을 읽고 느끼는 감상 역시 남성과 여성의 구분이 뚜렷하다. 여자들은 대개 삶의 본질이나 내용을 중시하는 반면 남자들은 주로 삶의 골격이나 기본틀, 말하자면 삶의 형태나 겉모습을 중시한다. 이러한 관점으로 인해 남성과 여성은 책의 선택에서부터 갈린다. 시나 소설 등 문학을 중시하는 여성과 경제나 경영, 정치나 철학 등 논리를 중시하는 남성은 같은 책을 읽고도 호불호가 갈림은 물론 책에 대한 감상 또한 판이하게 달라진다. 물론 남성이든 여성이든 예외는 있게 마련이지만 말이다. 남성을 일부러 디스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소위 '가오'에 목을 매는 남자들은 자신의 지나친 허세나 자만심으로 인해 삶의 알맹이야 어떻든 간에 남들이 보기에 겉만 번지르르하면 만사 오케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이러한 까닭에 남자들의 독서는 중요한 부분을 놓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세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시건축가이자 전직 국회의원인 김진애의 저서 <여자의 독서>를 읽으면서 나는 저자의 공감 능력과 빼어난 글솜씨에 감탄했다. 저자가 이미 30여 권의 책을 낸 저술가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 채 정치인이자 공학도라는 이미지만 나의 내면에서 너무 강하게 자리잡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실제로 접하는 그녀의 글솜씨가 웬만한 작가 뺨치는 수준이었고, 문학에 대한 이해도나 지식 역시 상당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책이 귀하던 시절이라 손에 걸리는 책이라면 다 읽었다. 어린이용 도서가 별로 없던 시절이니 주로 어른 책을 읽었다. 명저만 읽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집에 굴러다니던 '야동' 소설까지도 다 읽었다. 물론 '몰래' 읽엇지만 말이다. 꽤 나이 차가 나는 오빠 언니가 들여오는 온갖 '고전 시리즈'는 늘 내 차지였다. 한국문학선집, 세계문학선집, 명작 전집은 물론이고 역사서, 철학서, 사회과학서들을, 말 그대로 '닥치고' 읽었다. 문자중독증 수준이라 할 정도로 빠졌던 것이다. 책은 나의 멘토이자 선생님이었고, 나의 동지이자 친구였다." (p.31)

 

저자 자신을 일깨운 여러 명의 여성 작가와, 그들이 쓴 책 속에서 자신이 발견한 것들에 대해 저자는 8가지 주제로 분류하여 쓰고 있다. 여성의 자존감을 일깨우는 책(1장), 원하는 캐릭터를 발견하고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책(2장), 섹스와 에로스의 세계를 여는 책(3장), 여성들끼리 연대감을 나눌 수 있는 책(4장), 여성의 독특한 시각을 깨우치고 능력을 확장시켜주는 책(5장), 행동하는 용기를 예찬하는 책(6장), 여자를 지키는 수호신을 찾아서(7장), 여성성과 남성성을 넘나들며 보편적 자아를 찾게 하는 책(8장)이 그것이다.

 

"선천적인 성향인지 후천적인 성향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갈등과 딜레마를 안고 있는 사람, 그런 갈등과 딜레마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일을 해낸 사람, 또한 해내려고 끊임없이 발버둥치는 사람이 좋다. 갈등이 없는 삶, 안온함만이 있는 삶, 모자람이 없는 삶, 개인의 만족만 추구하는 삶, 세속적 성공으로 만족하는 삶이란 얼마나 금방 허망해지는가?" (p.59)

 

이 책에 등장하는 여성 작가는 국적도, 그들이 추구했던 분야도, 살다 갔거나 사는 시기도 제각각이다. 그러나 그들 각자의 면면을 살펴보면 뭔가 통하는 게 있다. 박경리, 한나 아렌트, 버지니아 울프, 루이자 메이 올컷, 루시 모드 몽고메리, 제인 오스틴, 마거릿 미첼, 루이제 린저, 박완서, 정유정, 정희진, 이자크 디네센, 레이첼 카슨, 제인 구달,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앤 패디먼, 수전 손택, 프리다 칼로... 저자가 말하는 책에 대한 담론은 결국 그녀 자신의 이야기로 귀결된다. 1남 6녀의 딸부잣집 셋째 딸로 자란 저자가 느꼈던 '여자다움'과 '여자의 역할'을 둘러싼 정체성에 대한 의문, 차이와 차별에 대한 혼란과 불만, 현재의 자신으로 성장시키는 과정에서 만난 다양한 여성 작가와 여러 책들.

 

"'여성성과 남성성은 절대적으로 한 인간 속에 있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한 인간 속에 있는 여성성과 남성성을 잘 발휘하며 사는 삶이 좋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다.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님을 발견할 때마다 너무도 반갑다. 예컨대, 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나와 같은 생각을『자기만의 방』에서 훨씬 더 근사한 말로 표현했다. "양성적 마음이란 타인의 마음에 열려 있고 공명하며,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감정을 전달할 수 있고, 본래 창조적이고 빛을 발하며 분열되지 않은 것이란 뜻"이라니 얼마나 멋진 표현인가?" (p.364)

 

나도 역시 지금껏 꾸준히 책을 읽어왔고, 읽었던 책에 대한 감상을 이따금 글로 옮기고는 있지만 문장 하나하나에 대해, 작가의 생각 하나하나에 대해 공감하며 그 낱낱의 감정들을 솔직하게 표현했노라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다. 글을 쓰는 일엔 원체 재간이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공감의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고 했던 어느 영화 대사를 패러디하여 말한다면 나는 아마도 "우리는 가오만 있지, 실속이 있냐?"고 하지 않을까? 가오를 잡기 위해 책을 읽는 일체의 행위를 반성하게 되는 하루다. 무더위에 지친 여름, 그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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