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에는 선(善)이 악(惡)을 이길 것이라는 우리 세대의 판타지는 우리가 사라지고 난 다음 세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명제로 남아 있을 듯하다. 그것이 참이든 거짓이든 상관없이.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종교가 없던 과거의 어느 시점에 이 명제는 신흥 종교의 광고성 멘트로서 적절히 활용되지 않았을까 싶은 것이다. 인간의 수명을 100년으로 잡았을 때 그 시간내에 자신이 목격한 모든 악이 결국에는 선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증명할 방법은 사실 없는 것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동전 던지기의 횟수를 늘리면 늘릴수록 앞면이 나올 확률도, 혹은 뒷면이 나올 확률도 1/2에 수렴하는 것처럼 선과 악의 승패도 반반의 확률로 수렴하는 게 아닐까 싶다. 다음 세대에는 기필코 선이 악을 잠재울 수 있다고? 그것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자신은 이미 사라져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데. 결국 모두의 바람이나 희망과는 상관없이 우리가 경험하는 선과 악의 승패는 제각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와 같은 경험에 의해 누군가는 선이 이긴다고 믿고, 또 다른 누군가는 악이 이긴다고 믿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대개 악보다는 선쪽에 베팅을 하는 경향이 있다.

 

오늘 아침에는 산에서 비를 만났다. 우르릉 쾅쾅 요란한 천둥 소리를 무시한 채 우산도 없이 산을 올랐던 게 화근이라면 화근이었다. 조금 흐리기는 했지만 멀끔한 하늘을 보니 설마 비가 오겠어,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웬걸, 미처 산을 다 오르기도 전에 후둑후둑 빗방울이 떨어지는 게 아닌가. 속수무책으로 비를 맞았다. 비라고 해야 채 5분도 내리지 않았으니 대부분은 나뭇잎에 가려 바닥에 닿지도 않았고 내가 맞은 빗방울은 불과 몇 방울 되지도 않아 아마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있을 터였다.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탓이지 일주일이 금세 지나간 느낌이다. 날씨는 끄물끄물 흐려 있고 뭔가 색다른 게 먹고 싶어지는 한낮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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