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벨 훅스 지음, 이경아 옮김, 권김현영 해제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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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커서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묻는 선생님의 질문에 '현모양처'라고 대답하는 여학생들이 무척이나 많았었다. 못 믿겠지만 사실이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이구동성의 대답이 이어지는 경우도 허다했다. 지금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획일화된 북한 주민의 답변을 듣는 듯 섬뜩한 느낌마저 들겠지만 말이다. 뿐만 아니라 존경하는 사람을 묻는 질문에서도 현모양처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인 '신사임당'이 자주 들먹여지곤 했었다.

 

그러나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사정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민주화 운동이 거세게 일었던 당시의 상황과 맞물려 대학에 진학했던 소수의 여대생들은 민주화라는 시대적 사명과 여성해방이라는 젠더적 사명을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 또래의 남학생들과는 상당히 다른 대학생활을 선택하곤 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민주화를 위한 국가권력과의 투쟁에 앞장서는 한편 여성 운동의 기수로서 부조리한 현실을 까탈스럽게 따지거나 가부장제 사회에 익숙한 남학생들과 시도 때도 없이 논쟁을 벌이곤 했다. 그런 까닭에 당시의 남학생들이 페미니스트에 대해 가졌던 생각은 '재수없다', '까탈스럽다', '별나다' 등 부정적이거나 적대적인 느낌이 대부분이었다. 페미니즘 운동에 몸담았던 당시의 여대생들은 가부장제 사회를 용인하며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여대생들과 양성평등이라는 개념조차 알지 못했던 대다수 남성들을 향해 강한 독기와 분노를 뿜어내곤 했다. 대한민국에서 초창기 페미니즘 운동을 선도했던 그들은 자신들과 뜻을 같이 하는 몇몇 동지들을 제외하면 다른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았다. 피아의 구별이 확실했던 그들은 대한민국 내에서 섬이 아닌 섬 생활을 자처했던 셈이다.

 

"여성들은 연령을 불문하고 남성중심주의나 젠더 평등에 대해 관심을 갖거나 분노하기만 하면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는 듯이 행동했다. 내면화된 성차별주의를 직시하지 않은 채 페미니즘의 기치를 든 여성들은 다른 여성들과 부딪히는 과정에서 페미니즘을 배반하곤 했다." (p.43)

 

미국의 대표적 페미니스트이자 사회운동가 벨 훅스가 써낸 페미니즘 입문서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은 우리나라 페미니즘 변천사와 견주어 차근차근 읽어볼 만한 책이다. 책의 효용성은 차치하고서라도 이 책을 읽음으로써 대한민국의 페미니즘 운동이 상당히 기형적인 형태로 전개되어 왔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여성이 여성으로 태어나기만 하면 페미니즘을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생적으로 알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젠더로서의 여성과 사회적 구성원으로서의 여성은 엄연히 다른 문제일 터, 여성이면서도 남성중심주의자들 못지 않게 차별적인 생각과 행동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음을 저자는 안타깝게 지적한다.

 

민주화 운동이 활발했던 8,90년대를 지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의 페미니즘 운동은 오히려 쇠퇴한 게 아닌가 싶다. 페미니스트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좋지 않은 시선으로 인해 동력을 잃었는지도 모른다. 미국에서의 초창기 페미니즘 운동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도 페미니스트 하면 남자들을 혐오하는 한 무리의 여성들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페미니즘 운동에 동참하는 여성들의 절대적인 숫자도 줄었을 뿐만 아니라 페미니즘에 반대하는 남성들의 인터넷 사이트가 등장하기도 하고, 그에 대항하여 남성들을 혐오하는 여성들의 인터넷 사이트가 등장하기도 하면서 페미니즘 운동은 사회운동으로서의 명분마저 상실해가는 듯하다.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페미니즘 운동은 인터넷상의 남녀 대결 양상으로만 번졌을 뿐 사회운동으로서의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혹자는 그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인권이 과거에 비하면 상당히 높아진 게 아니냐고 말이다. 맞는 말이다. 법률이나 제도적으로 상당한 진전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사회 구성원, 특히 여성을 대하는 남성의 태도나 인식도 함께 발전했던 것은 아니다. 권력의 상층부는 여전히 남성들의 차지이고 그들은 징징대는 여성들을 향해 그들 몫의 일부를 적선하듯 던져주었을 뿐이다.

 

"우리는 이제 페미니즘 투쟁을 다시 시작할 준비를 마쳤다. 페미니즘 운동만큼 가부장제가 여성과 남성의 행복을 얼마나 위협하는지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도 없기에 반페미니즘 역풍은 여전히 존재한다. 만일 페미니즘 운동이 성차별주의와 남성중심주의의 영구화가 어떤 위험을 내포하는지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다면 페미니즘 운동은 실패했을 것이다." (p.261)

 

저자도 강조하고 있지만 페미니스트가 반대하는 것은 '남자'가 아니라 '남성중심주의'이다 그것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페미니즘 운동이 대다수 남성과 일부 여성으로부터 반발을 사는 이유는 위의 전제를 실행에 옮기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 역사에 비추어 볼 때 남성중심주의의 폐해로 인해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곤경에 처했는지 따져볼 필요는 있지만 그런 이유로 현재의 남성들을 적대시한다면 페미니즘 운동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축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힘들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겠지만 페미니즘에 무지한 남성들을 계몽하고 성차별주의에 동조하는 여성들을 설득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 책은 그러한 길고 지난한 싸움을 시작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지구상의 평화를 바라는 모든 이들을 위한 작은 지침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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