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가 되자 날씨는 빠르게 변했다. 마치 급한 볼일이 있어 서둘러 자리를 뜨는 사람처럼 말이다. 희끄무레하던 하늘이 문득 밝아지고 먼산의 안개가 서서히 걷히는가 싶더니 어느새 구름 사이로 말간 해가 얼굴을 드러냈다. 요즘은 쓰지 않는 우리말 중에 '빗밑이 재다'라는 말이 있다. '빗밑'은 오던 비가 그치어 날이 개는 속도를 이르는 말이다. 그리고 '재다'는 '동작이 재빠르다'의 뜻이니 '빗밑이 재다'고 하면 비가 그치어 날이 개는 속도가 빠르다는 뜻이 된다. '빗밑이 가볍다'라고도 쓰는데 어제부터 내리던 비가 그치고 날이 가볍게 개이는 걸 보니 문득 생각이 났다. 잘난 채하려고 쓴 말은 아닌데 결과적으로 그런 꼴이 되고 말았다, 암튼.

 

대통령 선거를 한 달여 남겨둔 요즘, 사람들은 누가 대통령이 되든 관심 없다는 듯 시큰둥한 모습이다. 보수 후보의 몰락이 가져온 결과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보수 후보와 진보 후보가 팽팽한 세 싸움을 벌여 누가 이길지 예측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정치에 가 있겠지만 작금의 상황은 진보 후보 중 조금이라도 맘에 드는 후보를 뽑아야 하는 격이니 도무지 흥이 나지 않을 밖에...

 

오늘 낮에 점심을 먹는데 사람들은 대선 이야기로 후끈 달아올랐었다. 출마한 후보 중 누구를 뽑아야 할지, 그렇다면 가장 가능성이 많은 후보는 누구인지, 대통령으로서 가장 적합한 인물은 누구인지 각자의 의견이 분분했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들의 판단은 어떨지 모르지만 이것 하나만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이 생각할 때 정치는 마치 고도의 이성적 행동인 듯 보이지만 실은 감정에 의한 진흙탕 싸움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자신의 선택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나만은 언제나 이성적 판단에 의해 후보를 선택해 왔고 앞으로 그럴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그 면면을 살펴보면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막연히 누가 싫어서, 또는 주는 것 없이 그가 무작정 예뻐 보여서 그냥 선택했을 뿐이다. 막장도 그런 막장이 없다. 인정할 건 깨끗이 인정하는 게 낫다. 나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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