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운동을 마치고 산을 내려오는데 등산로 옆에서 내 친구 '너구리 군'을 만났다. 등산로 주변에서 보았던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말하자면 그와 나는 구면인 셈이다. 지난번에는 오늘처럼 등산로 초입의 아파트 인근이 아니라 밤나무 농장이 있는 산의 능선 부근에서 마주쳤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오늘처럼 여명이 밝아오는 순간이 아니었고, 나는 짙은 어둠이 깔린 산길을 플래시 불빛에 의지하여 걷고 있었다. 그는 밤농장 주변에 둘러쳐진 그물망 옆에서 털을 고르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다짜고짜 스마트폰을 카메라 모드로 전환하여 "어이, 친구. 사진 한 장만 찍어도 되겠나?" 물었더니, 그는 "초면에 실례가 아닌가."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쌩하니 가버렸었다. 그런데 오늘은 나의 인기척을 느꼈던지, "어이, 친구. 어쩐 일인가?" 하며 먼저 인사를 하는 게 아닌가. "아니 이게 누군가. 너구리 군 아닌가. 반갑네, 친구."하면서 그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의 느긋한 표정에 안심이 되었던 나는 "사진 한 장만 찍어도 되겠나?" 하고 물었더니 천천히 일어나 나를 위해 멋진 포즈를 취해 주었다.

혹시나 싶어서 다시 한 컷을 찍으려 하자 그는 "이거 쑥스럽게 왜 이러나. 한 장만 찍는다고 하지 않았나?" 묻기에 "미안허이. 혹시나 찍히지 않았을까 싶어서 그만..." 내가 카메라를 거두는 걸 보면서 그는 이제 가야겠다는 듯 펜스 근처의 비탈을 서둘러 내려왔다.
미안한 마음도 없지는 않았지만 서둘러 한 컷을 더 찍었다. 산의 주변이 온통 아파트 공사 현장으로 밤이고 낮이고 중장비 소리가 멈추질 않는다. 내 친구 너구리 군도 자신의 보금자리를 잃은 지 한 달여가 지났지만 마땅한 자리를 찾지 못한 채 떠돌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이제 어디로 가려는가?" 물었더니 "마땅한 곳이 없나 더 찾아봐야지. 정 안 되면 이번에는 더 깊은 산 속으로 이사를 가야하지 않겠나."하면서 처진 어깨를 힘없이 떨어트렸다.
내가 서 있던 자리를 돌아 여명이 밝아오는 숲속으로 사라지는 너구리 군의 모습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그는 내게 자신의 치명적인 뒤태를 뵈주면서 "조심해서 내려가게, 친구." 하였다. 꼬리를 흔들며 작별 인사를 하는 너구리 군에게 왠지 모를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인간의 욕심 때문에 그의 보금자리마저 빼앗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같은 인간으로서 죄책감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잘 가게, 너구리 군. 늘 건강하시게." 마음에서 그의 건강을 빌어주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