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를 멈춘 머릿속 기억들을 소재로 무엇인가 색다른 글을 써보려고 시도할 때가 있다. 그렇다고 내가 작가라거나 그쪽 계통의 직업을 갖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작가 코스프레가 취미인 것도 물론 아니고. 아무튼 나는 모처럼 맞는 여유로운 시간을 아무런 성과도 없이 붓방아만 찧다가 마는 게 고작이니 번번이 나는 귀한 시간만 허비하는 꼴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의미도 없는 그런 짓을 아주 오래된 취미라도 되는 양 반복하는 것이다. 남들이 들으면 젊은 사람이 참 안됐다, 하면서 혀를 끌끌 찰 일이지만 나는 성과도 없고,그렇다고 경제적 이익도 없는 그 짓에 익숙하다 못해 편안한 느낌마저 드는 것이다. 삶은 비경제적 일상으로 떠받쳐진다는 허튼 신념을 자랑이라도 하는 양.
오늘도 나는 혼자만의 여유로운 시간을 무참히 흘려보내고 나른한 오후에나 있을 듯한 몽롱한 의식 속에서 이와 같은 낙서 수준의 글을 끄적이고 있다. 오전에 윌리엄 스타이런의 <보이는 어둠>을 읽고 왠지 모르게 우울해졌고, 그래서인지 점심을 먹은 직후부터 밀려오는 졸음을 이기지 못해 잠시 동안 꾸벅거리며 졸았었다. 힘들기로만 따진다면 밋밋하고 맨송맨송한 나날을 견디는 것보다 벅차도록 기쁘고 다시 없을 듯한 행복에 겨운 날들을 보내는 것이 더 버겁고 힘에 부치는 일일 텐데 다들 행복에 목말라 하는 걸 보면 고생을 사서 하고 싶은 게 인간의 본능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산다는 건 결국 자신이 가진 에너지를 기억과 정보로 끝없이 치환하는 작업이다. 언젠가 몸 속 에너지가 다 소진되고 나면 잠에 빠져들 듯 영원한 안식에 들겠지만 나의 에너지와 내가 얻을 수 있는 기억이 등가성이 아니라는 사실에 때로는 실망하고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절망하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삶은 살아볼 가치가 있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날이 오고야 만다. 모르긴몰라도 그럴 것이다.
"로맹 가리는 카뮈가 깊은 절망 상태에서 종종 자살을 언급하곤 했다고 귀띔해주었다. 때로는 농담조로 말했지만 로맹 가리를 상심하게 할 만큼 그 농담 속에 뼈가 들어있었다. 그러므로 저변에 깔린 멜랑콜리한 어조에도 불구하고 『시지프의 신화』에 죽음을 지배하는 생의 승리라는 엄숙한 메세지(희망이 부재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해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다 - 가까스로)가 담겨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보이는 어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