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질없는 짓인 줄 뻔히 알면서도 군말 없이 해야 할 때가 종종 있다. 그렇지 않은가? 그럴 때마다 나는 그것이 마치 삶이라는 긴 통로에 일정한 간격으로 의미도 없이 서 있는 가로등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밋밋한 길에 약간의 운치를 더하기 위한 가로등 말이다. 적어도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런 일들은 대개 일정한 시차를 두고 무한 반복하는 성질이 있다는 점도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한 이유가 되긴 하지만 그것에 앞서 어차피 삶이라는 통로는 '나'라는 단 한 사람을 위한 길인데 굳이 운치를 더할 이유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나' 외에는 봐줄 사람도 없는데...
이상하게도 김연수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매번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된다. 김연수의 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부질없는 열망의 반복 때문인지도 모른다. 기억의 저쪽 끝까지 마침내 닿고야 말겠다는 부질없는 욕망. 작가 김연수는 결국 그것을 위해 소설을 쓰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시간을 되돌리면 기억의 심연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헛된 꿈이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처럼 작가도, 또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기억은 만들어지는 그 순간부터 이미 조금씩 변형되고 서서히 잊혀져가기 때문이다.
김연수의 열망은 때론 양자역학의 이론과도 닮아 있다. 모든 물질은 결국 완전히 접촉할 수 없다는 원리 말이다. 세상의 모든 물질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고 원자는 중심의 원자핵과 그 주변을 도는 전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원자핵과 전자 사이에는 일정한 공간, 즉 허공이 존재하므로 원자와 원자의 결합은 결국 허공과 허공의 만남인 셈이라는 다소 역설적이면서도 난해한 원리. 그러므로 물질과 물질의 접촉은 결국 영원히 좁혀지지 않는 허공과 허공의 간극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시공간도 이와 같은 게 아닐까? 우리의 기억마저도 말이다. 기억 저편의 시간으로 최대한 가까워질 수는 있지만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빈 공간은 언제나 남게 마련이니까.
김연수의 소설집 <세계의 끝 여자친구>는 소설에서 작가가 이루고자 했던 꿈의 단면을 읽을 수 있다. 그것은 현재 시점에서 추구하는 기억의 재현일 수도 있고, 과거 속에서 펼쳐지는 기억의 재구성일 수도 있다. 어떤 식으로 말한다 해도 과거의 기억을 향해 내달리는 작가의 열망을 숨길 수는 없을 듯하지만 말이다. 작가가 기억에 집착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것을 기억하기 위한 목적만은 아닐 것이다. 현실이라는 시공간이 주는 많은 제약들, 이를테면 도덕과 이성에 의해 쪼그라들었던 욕망의 불꽃들이 과거라는 상상의 틀 안에서는 얼마든지 부풀려지고 끝 간 데 없이 분출되기 때문에 현실에서 감추어졌던 우리 내면의 많은 욕망들을 낱낱이 들추어 보기 위해서는 과거라는 틀이 반드시 필요했을 테니까.
"두 눈을 감고 가만히 들어본다. 신호등의 불빛이 바뀔 때마다 자동차들이 일제히 도로를 질주하는 소리가 흘러든다. 조금 열어둔 창문 틈으로. 그 소리가 파도 소리를 닮아, 내 귀가 자꾸만 여위어간다. 두 눈을 감고 가만히 들어보면, 수천만 번의 겨울을 보내고 다시 또 한 번의 겨울을 맞이하는 해변에 혼자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므로. 그게 그 해변의 제일 마지막 겨울이라서 파도 소리를 듣는 일이 그토록 외로운 것이라고. 그렇게 두 눈을 감고 나는 가만히 들어본다." (p.141 '모두에게 복된 새해- 레이먼드 카버에게' 중에서)
책에 수록된 작품은 표제작인 '세계의 끝 여자친구'를 포함하여 총 9편이다. 여성작가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과거에 열일곱 살 연하의 한국인 남자친구를 두었던 미국 작가의 이야기를 다룬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라는 단편은 이 책에 수록된 첫 작품이다. 출판사에서 작품의 순서를 정하였는지도 모르지만 작가는 왜 이 작품을 책의 처음에 배치했을까? 책을 읽는 내내 나는 그 이유가 궁금했었다.
"해피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지나가고 난 뒤에도 저 불은 우리의 예상보다 좀더 오랫동안 타오를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 안에서. 내부에서. 그 깊은 곳에서. 어쩌면 우리가 늙어서 죽을 때까지도. 이 우주의 90퍼센트는 그렇게 우리가 볼 수 없는, 하지만 우리에게 오랫동안 영향을 미치는, 그런 불들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을. 물론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그 불들을 보지 못하겠지만." (p.32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 중에서)
어쩌면 우리네 삶도 결국 자신이 희망하는 어떤 것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점에서 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실체도 없는 어떤 것을 향해 끝없이 달리다가 어느 순간 세상의 모든 빛이 '퍽' 하고 사라지고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이유도 없이 내동댕이쳐지는 게 우리네 삶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사랑했던 건 '사랑'에 얼마나 가까웠으며, 행복했던 경험은 또 얼마나 '행복'과 닮았던 것일까? 우리는 결국 그 모든 경험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행복의 실체에 단 한발짝도 다가서지 못했던 건 아닐까? 문득 두려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