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크 미 잭 리처 컬렉션
리 차일드 지음, 정경호 옮김 / 오픈하우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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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차일드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어릴 적 친구 한 명이 떠오르곤 한다. 만화책보다 무협지를 더 좋아했던 친구. 국민학교를 졸업하기도 전부터 무협지라면 모르는 게 없었던 그는 또래보다 조금은 조숙했고, 이따금 말을 더듬었고, 친구들보다 키가 한 뼘쯤 더 컸었고, 덧니가 인상적인 아이였다. 그 친구가 금강, 사마달, 서효원, 야설록, 용대운, 운중행 등 이름조차 중국스럽거나, 무협스러웠던 작가들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 놓을라치면 친구들은 다들 목을 길게 뺀 채 넋을 놓았다. 친구도 그때만큼은 말을 더듬지 않았다. 답설무흔이니, 어기비행술이니, 십갑자의 내공이니, 주화입마니 도통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힘든 말들을 친구는 거침없이 사용하면서 다른 아이들의 기를 죽이곤 했었다.

 

지방에서 대학을 졸업했던 친구는 서울에 있는 대학의 대학원에 진학했고, 딱히 바쁜 일이 없었던 나는 이따금 친구의 자취방을 찾았고, 공인회계사였던가 세무사였던가 아무튼 어떤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던 그는 허구한 날 집 안에 틀어박혀 공부를 했고, 맥주병이나 음료수병엔 담배꽁초가 가득 채워져갔고, 그러는 사이에 졸업을 했고, 마냥 미뤄두었던 군대를 다 늦은 나이에 가게되었고, 이래저래 사는 게 바빴던 그와 나는 연락마저 뜸해지다가 그도 나도 결혼을 했고, 몇 번인가 이사를 한 후로는 숫제 연락마저 끊겨버렸다. 사는 게 바쁘다는 핑계로.

 

샛길로 빠지는 바람에 서두가 길어졌다. 말하자면 이 책은 '서양의 무협지'라고 해도 좋을 그런 소설이다. 이 책뿐만 아니라 리 차일드의 소설이 다 그렇다. 잭 리처를 주인공으로 쓴 '잭 리처 컬렉션' 스무 번째 이야기인 <메이크 미>는 디프 웹(Deep Web : 일반 검색 사이트로 검색이 가능한 웹인 표면 웹(Surface Web)과 비교되는 용어로 각국의 정부 자료나 기업의 비밀 자료, 또는 불법적인 정보가 거래되는 심층적인 웹을 의미하며 다크 웹(Dark Web) 또는 섀도 웹(Shadow Web)이라고도 함)을 소재로 하고 있다.

 

전직 헌병 군수사관 출신인 잭 리처는 아무런 목적도 없이 미국 전역을 떠돌고 있다.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 시카고로 가려고 했던 그는 마더스 레스트(Mother's Rest)라는 시골 마을 이름에 이끌려 기차에서 무작정 내린다. 휴대폰도 터지지 않는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고, 잭 리처는 마을 이름의 유래에 대해 이런 저런 상상을 한다. 195센티미터의 키에 110킬로그램의 거구인 그를 보고 전직 FBI 출신의 사설탐정 장이 다가온다. 리처를 자신의 동료로 착각했던 것이다. 동료인 키버의 지원요청을 받고 마더스 레스트에 도착했던 장은 그의 실종에 대한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리처에게 도움을 청한다. 리처와 장은 키버가 묵었던 모텔 객실에서 키버의 것으로 추정되는 메모지 한 장을 발견한다. 거기에 적힌 'LA 타임스'기자의 전화번호와 '사망자 200'이라는 단서를 쥐고 장과 리처는 끝없는 추격을 시작한다.

 

'모든 명령에 대한 즉각적인 응답'을 뜻하는 은어로서 <메이크 미>라는 책의 제목은 600페이지에 가까운 장대한 스케일의 소설 끝부분에 이르기까지 독자는 그 제목이 뜻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한 채 깊이 빠져들게 된다. '마더스 레스트'라는 온화한 지명과는 반대로 잔인한 범죄 집단의 거점이었던 그곳을 초토화시키는 데에는 많은 인원이 필요치 않았다. 리처의 동료이자 연인이었던 장과 LA 타임스 기자 웨스트우드, 그들 세 명이면 충분했다. 리 차일드의 소설이 언제나 그렇듯 모든 면에서 완벽한 잭 리처와 잔인한 범죄집단과의 숨막히는 추적과 빠른 스토리 전개, 시원한 액션과 달달한 로맨스가 일품인 책이다.

 

이따금 도서관에 들러 보면 지금도 무협 판타지 소설이 누군가에 의해 쓰여지고 또 누군가에 의해 읽혀진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친구의 소식이 궁금해지곤 한다. 누구보다 무협지를 사랑했던 친구. 그가 지금 곁에 있다면 나는 어쩌면 리 차일드의 소설 한 권을 그에게 건넬지도 모른다. "여보게 친구. 요즘은 사람들이 무협지 대신 리 차일드 소설을 읽는다네. 그러니 자네도 한 번 읽어보게."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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