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너무 한낮의 연애
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5월
평점 :
<너무 한낮의 연애>, 책의 제목만 보면 꽤나 더위가 느껴지는 소설인 듯하다. 말하자면 느낌이 그렇다는 얘기다. 그러나 책을 펼쳐 들고 불과 서너 쪽을 넘기기도 전에 손끝에서부터 전해지는 서늘한 느낌으로 인해 당신은 어쩌면 화들짝 놀랄지도 모르겠다. 공포소설이나 스릴러 소설도 아닌데 이런 느낌은 도대체 뭔가, 하고 말이다. 더구나 책의 제목에서 이미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은 김금희 작가가 2014년부터 2015년까지 발표했던 9편의 단편소설을 엮은 연애 소설집인 듯한데.
나는 대체로 순간적인 직감을 신뢰하는 편이다. 남들에 비해 예민하다거나 시쳇말로 '촉이 좋다'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런 근거도 없이 떠오르는 단순한 느낌을 그저 신뢰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어쩌면 '무작정'이라는 부사를 앞에 첨가해야 할런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내 생각에 <너무 한낮의 연애>를 읽으면서 느꼈던 '서늘한 느낌'은 '결핍'이나 '허무'의 감정에서 비롯된 '자포자기의 느낌'과도 무척이나 닮아 있는 듯했다. 일반화 할 수는 없지만 현대인의 가장 큰 특징은 집착이나 소유의식의 결여에서 오는 '열정의 제로 상태'가 아닐까 싶다. 적어도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소설 속 주인공의 이야기에 '서늘한 느낌'을 받았던 것처럼 열정이 없는 사람들은 한여름 태양 아래에서도 가벼운 추위를 느끼는 법이니까.
표제작인 '너무 한낮의 연애'에 나오는 주인공 '필용'은 대기업 영업팀장으로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좌천되어 건물 지하에 있는 시설관리팀으로 내려간다. 그 후로 그는 사람들의 시선이나 자신 스스로가 느끼는 자괴감으로 인해 그는 회사 식당에서의 점심을 포기한 채 무작정 종로 거리로 나선다. 그렇게 무심코 걷던 그 거리에서 '필용'은 대학 시절 자신이 다녔던 어학원과 자주 들렀던 패스트푸드점을 발견하고는 자신도 모르게 그곳으로 발길이 옮겨졌다. 자신이 주문한 햄버거를 먹으며 무심코 바라본 창밖에서 그는 "나무는 'ㅋㅋㅋ'하고 웃지 않는다"라는 문구의 현수막을 우연히 보게 된다.
대학 시절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 후배 '양희'가 썼던 연극 대본의 제목이었다. 그 시절 '필용'은 깡마르고 부스스하고 여성적인 매력이라곤 전혀 없었던 '양희'를 그저 햄버거나 같이 먹으며 자신의 허풍을 들어주는 후배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그러던 그녀가 어느 날 "나 선배 사랑하는데" 라고 뜬금없는 고백을 한다. '필용'에게는 감정의 파동을 느끼게 하는 말이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묻는 '필용'에게 "모르죠, 그건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고.", "지금 사랑하는 것 같아서 그렇게 말했는데, 내일은 또 어떨지 모르니까요."라고 말했던 '양희'. 젊은 사람들이라면 적어도 미래를 위해 하나쯤 보험처럼 간직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욕망이나, 이해타산이나, 자존심이나, 수치심과 같은 속성이 그녀에겐 전혀 없었다. 몇 달 뒤 '필용'은 문산에 있는 '양희'의 집을 찾아간다. 그러나 그곳에서 '필용'은 그녀가 사는 누추한 집과 가난한 가족들을 보았고 자신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굳게 믿는다. '양희'에게 사과하는 '필용'. 그러나 '양희'는 '사과 같은 거 하지 말고 그냥 이런 나무 같은 거나 보라'고 말한다.
어떤 절망적인 현실을 잊기 위해 우연히 들렀던 종로 거리와 그 속에서 대면하게 된 자신의 과거. '필용'은 종로 소극장에서 10여년 만에 재회한'양희'의 연극을 보면서 "시간이 지나도 어떤 것은 아주 없음이 되는 게 아니라 잊지 않음의 상태로 잠겨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한때 철없음으로 인해 저질렀던 부끄러운 일들이 어떤 것을 계기로 기억 속에서 되살아날 때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가. 용서의 대상도, 그래야만 했던 시간도 이미 잊혀져가는 저 과거 속에서 되살릴 방법은 전혀 남아 있지 않은데 말이다.
이번 소설집에는 '너무 한낮의 연애'와 함께 '조중균의 세계', '세실리아', '반월', '고기', '개를 기다리는 일', '우리가 어느 별에서', '보통의 시절', 고양이는 어떻게 단련되는가' 등 9편의 단편이 실렸다.
"집집을 돌아다니다보면 머리가 지끈지끈해지면서 속이 울렁거리는데 집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완고하게 자기 스타일대로 평생을 살고 그러다보면 냄새가 만들어졌다. 그건 특정 영역의 냄새였으며 타인을 밀치는 냄새였다. 자기 고양이를 찾아주러 온 그를 사람들은 깍듯하고 친절하게 대했지만 아무튼 그 냄새는 진저리나게 게별적이고 고유한 것이라서 언제나 부루퉁하고 신경질적이었다." ('고양이는 어떻게 단련되는가' 중에서 p.237)
내일이면 사라질지 모르는 감정이지만 오늘은 선배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양희'의 고백처럼 지금 이 순간의 현실은 언젠가 또 부끄러워해야 할 과거로 바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삶은 그저 살아가는 것이지 지난 과거를 붙잡고 사과로 일관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 소설집에 실린 9편의 단편에는 저마다의 과거를 지닌 인물들이 등장한다. 어떻게 읽으면 무미건조한 문체일 수도 있고, 또 어떻게 읽으면 쿨한 느낌일 수도 있는 김금희 작가의 소설을 나는 '고급지다'고 느꼈다. 감정이라곤 조금도 실리지 않은 듯한, 무심한 듯 스쳐가는 창밖의 풍경처럼 작가는 그렇게 소설을 쓴다. 우리의 과거도 그렇게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당신의 과거는 안녕하냐'고 묻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