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고차 월든 - 잉여 청춘의 학자금 상환 분투기
켄 일구나스 지음, 구계원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6월
평점 :
품절


얼마 전에 새로 취임한 한국장학재단 이사장의 분별 없는 발언이 구설수에 올랐다는 기사를 뉴스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그의 말인 즉 "국가 장학금 규모를 줄이고 무이자 대출을 늘릴 계획"이라고 밝히면서 "빚(채무)이 있어야 학생들이 파이팅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어떤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발언은 과거의 어느 시점(예컨대 1980년대와 같은), 아무리 큰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일단 대학 졸업장만 손에 쥐면 적당한 일자리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던 그런 시절에는 능히 할 수 있는 말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요즘처럼 이십대 태반이 백수(줄여서 '이태백'이라고 하던가요?)인 시대에 그의 말은 전혀 설득력이 없어보였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는 현실감각이 없는 구세대의 한 사람이었을 뿐 한국장학재단을 맡아 운영할 만큼 요즘 젊은이들의 생활을 잘 이해하는 사람은 아니었던 게지요.

 

우연이겠습니다만 며칠 전에 나는 이런 문제를 안고 있었던 한 젊은이의 분투기를 책으로 읽었습니다. 켄 일구나스가 쓴 <봉고차 월든(Walden on wheels)>이라는 책이었죠. 제목이 좀 촌스럽죠? 그래서 나는 책을 읽기도 전에 '재미없겠는걸' 하는 선입견이 들었지 뭡니까. 그런데 웬걸요. 책은 의외로 쭉쭉 읽혔습니다.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지요. '잉여 청춘의 학자금 상환 분투기'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은 '우리나라의 젊은이들도 한번쯤 읽어보면 좋겠는걸' 하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재미와 교훈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 좋은 책이었습니다.

 

미국 뉴욕 주 서부의 작은 마을의 중산층 가정에서 성장했던 저자는고등학교 졸업 후 앨프리드 대학교에 진학했으나 터무니 없이 비싼 등록금 탓에 뉴욕주립대 버펄로 캠퍼스로 옮겨갑니다. 앨프리드 대학교의 학점을 인정받지 못해서 뉴욕주립대를 4년을 다녀야만 했고, 재학 시절 그는 슈퍼마켓의 카트 정리 아르바이트,신문배달, 패스트푸드점 조리사, 정원사, 공공 스케이트장 경비 등 여러 아르바이트를 전전했고, 몇 차례의 인턴도 경험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힘들게 대학을 마쳤건만 대학을 졸업한 후에 그가 손에 쥐었던 것은 취업에는 아무짝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역사학과 영문학 학사 학위증과 3만 2000달러라는 거액의 학자금 대출뿐이었다고 회상합니다.

 

"닥친 상황이 너무나 한심했기 때문에 일해야 한다는 사실이 그 어느 때보다 경멸스러웠다. 5년이나 대학을 다니고, 두 차례나 무급 인턴으로 일하고, 3만 2000달러나 되는 빚을 지고도 나는 십대 때와 변함없이 취업시장에서 환영받을 요소는 전혀 갖추지 못한 채, 딱히 기술이 필요 없고 책임도 별로 지지 않는 저임금 노동만 벌써 몇 년째 하고 있었다." (p.83)

 

취업시장에서 수십 번 고배를 마신 그는 학자금 대출을 갚기 위해 집을 떠나 알래스카로 향합니다. 그가 머물렀던 곳은 언 발을 녹이는 장소라는 뜻의 콜드풋((Coldfoot)이었습니다. 경비행기 투어의 북극 지역종착점이기도 한 그곳에서 그는 숙식을 제공받는 조건으로 시급 9달러의 모텔 청소부, 여행가이드 등의 저임금 노동을 하며 1년을 보냅니다. 때로는 주방 보조를 하기도 했고, 철거 작업에 참여하기도 하면서 닥치는 대로 일을 한 덕분에 그는 1만 8000달러의 빚을 청산합니다. 휴대폰도 통화가 되지 않는 알래스카의 오지에서 안 먹고, 안 입고, 안 쓴 결과였습니다. 다달이 갚아야 하는 학자금 대출의 몇 개월분을 미리 선납했던 그는 비행기값도 아까워 히치하이킹으로 부모님이 사는 뉴욕에 되돌아옵니다. 그리고 그는 잠시의 여유로운 시간 동안 18세기 뱃사람처럼 캐나다의 온타리오를 뗏목 항해로 가로지르는 두 달간의 모험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이 항해를 통해 우리에게는 필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밖으로 내보내져야 할 필요가 있다. 서로에게 의지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해볼 필요가 있다. 다른 이들을 위해 희생해야 하고, 정원을 가꾸고, 지붕을 고치고, 이웃과 교류해야 할 필요가 있다." (p.187)

 

항해를 마친 후 그는 멕시코만 보호봉사단에 가입하여 미네소타로 향합니다. 그의 목표는 단 하나, 빚을 청산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소비생활을 줄이기 위해 1인용 텐트를 치고 생활하는 등 절제된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을 한 순간에 사로잡았던 여인 새미를 만났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새미는 우울증에 시달리며 몇 번의 자살시도를 했던 경험이 있었지만 회복을 위해 애쓰는 그녀를 위해 저자는 알래스카에서의 일자리를 구해주고 그녀와 함께 알래스카로 향하는 히치하이크를 감행합니다.

 

"나는 내 손으로 빚을 갚으며, 혼자 힘으로 여행하고, 일을 해도 가난하기는 하지만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살고 있었다. 이 사실을 깨닫기까지 왜 그리 오래 걸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더이상 누군가에게 무시당하고 괄시받을 사람이 아니었다." (p.188)

 

빚을 모두 청산한 뒤 그가 했던 결심은 다시는 빚지지 않겠다는 것과 인문학을 공부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목표를 위해 새미와 헤어진 그는 듀크대 대학원에 진학합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월든 연못가의 오두막에서 은둔했던 것처럼 대학원 생활 2년 반 동안 그는 낡은 봉고차에서 생활했습니다. 봉고차를 구입하고 대학교 구내에 차를 주차할 수 있는 주차증을 구입하고, 밖에서 내부를 볼 수 없도록 블라인드와 천으로 가리고, 식재료와 물건을 정리할 수 있도록 선반을 만들고, 의자를 이용하여 침대를 만든 후 그는 그곳에서 숙식을 해결했던 것입니다. 체육관에서 샤워를 하고 화장실에서 면도를, 도서관에서 휴대폰과 노트북의 충전을, 학교 근처의 빨래방에서 세탁을 하면서 그는 최소한의 소비를 이어갔습니다. 차에 쥐가 들어오는 바람에 심하게 아팠던 적은 있지만 금욕적인 생활 덕분에 몸은 더 건강해졌다고 그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자신이 사는 풍경의 본질과 성향이 비슷해진다. 농장이 근면성을 길러주듯이 사막은 검소함을, 산은 강인함을 길러주며, 바위투성이의 해안 지대는 낭만적인 설렘을 불러일으킨다. 마찬가지로 교외 지역은 따분함, 구태의연함, 순응하는 분위기를 조성한다. 나는 주변을 둘러싼 환경의 특징을 그대로 답습했다." (p.229)

 

학기중에는 봉고차에서 생활하며 아르바이트를 하고 방학 동안에는 알래스카의 국립공원에서 일하면서 그는 빚을 지지 않고 무사히 대학원을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부모님을 모신 졸업식장에서 그는 졸업생 대표 연설을 하였습니다. 저자도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만 사회에 공헌하기 위해 공부를 하는 젊은이들이 그 비용을 자신의 빚으로 떠안아 결국에는 그 빚으로 인해 자신의 삶을 저당잡힌다는 건 뭔가 문제가 있는 듯합니다. 대학을 진학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빚의 무서움을 고지하거나 장학금 지급을 늘리거나 뭔가 대책이 필요한 시점에 장학재단 이사장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가볍게 말을 했다는 건 현재 대학생들이 안고 있는 문제의 심각성을 전혀 모르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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