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이라도 같이 하자는 친구의 전화를 받은 것은 오늘 아침의 일이었다. 딱히 정해진 선약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요즘처럼 입맛이 없는 시기에 점심은 대충 때우면 될 일인데 점심 한 끼를 해결하기 위해 시간과 장소를 정해 친구와 만나고 또 메뉴를 고르느라 한참이나 머리를 쥐어짠다는 것이 괜한 정력을 소모하는 것도 같고 번잡스러운 느낌도 있어서 우물쭈물 망설이고 있었는데 친구는 다짜고짜 시간과 장소를 잡고는 꼭 나오라며 엄포 비슷한 투로 다짐을 받았다.
딱 맞게 도착하려던 것이 그만 조금 늦고 말았다. 친구는 언제 도착했는지 식당의 입구에서 잘 보이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멍한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고 해도 제 좋아하는 일을 찾아 종일 헤맬 듯한 놈이 오늘은 어쩐 일인지 어깨가 축 처지고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걸 보니 뭔 일이 있어도 단단히 있나 보다 하는 걱정이 들었다. 나는 식당 사람들이 다 들을 듯한 큰 목소리로 뭔 맛있는 걸 사줄려고 가라 오라 하느냐 물었더니 어라 이게 웬 일, 왔어 하면서 조용히 눈만 마주치는 게 아닌가.
나는 한껏 걱정이 되어 "뭔 일 있냐?" 물었더니, "뭔 일은 뭔 일, 그런 거 없어. 그냥 사는 게 재미 없어서 그래." 하는 게 아닌가. 돈키호테가 갑자기 햄릿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머리에 떠오른 생각이 어떠한 필터도 거치지 않고 바로 입으로 튀어나오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사는 게 재미없다는 표현은 영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이었다.
냉면을 무겁게 건져올리며 어렵게 어렵게 꺼낸 그의 변은 이랬다. 자신은 매년 4월만 되면 프로 야구를 보는 재미로 사는데 요즘에는 오히려 프로 야구 때문에 살 맛이 나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가 응원하는 팀은 올초까지만 하더라도 우승 후보로 낙점이 될 정도로 선수 보강을 많이 했는데 예상과는 달리 연전연패를 거듭한다는 거였다. 게다가 얼마 전에 치러진 총선에서 자신이 평생 지지하던 당이 무참히 패배했다는 사실이 삶의 의욕마저 꺾어놓았다는 것이다.
나는 속으로 '이런 미친 XX가 있나' 싶었지만 친구로 지내왔던 그동안의 정을 생각해서 전에 없던 다정한 표정으로 "흠, 그런 일이 있었구먼." 하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친구 왈, "프로 야구 팀이야 감독을 바꾸면 되지만 여당의 수장은 대통령인데 지지율 상승을 위해 대통령을 바꿀 수도 없고..." 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의 한숨이 지나간 자리가 10센티쯤 움푹 패인 듯했다. 얘기를 들어 보니 그가 응원하는 야구팀의 감독과 대통령의 공통점 또한 비슷해 보였다. 소통의 부족과 권위주의적 태도. 그럼 그렇지. 그런 사람을 믿고 따른다는 게 21세기에 가당키나 한 일인가. 반이나 남긴 친구의 냉면을 내가 다 먹고 말았다. 오늘 따라 밥맛이 더 댕겼다. 친구에게는 미안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