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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2시에 생각나는 사람
김정한 지음 / 미래북 / 2016년 3월
평점 :
전화 통화를 할 때마다 '한번 보자'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늘 길이 엇갈려 만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일부러 시간을 내어 찾아갈
참엔 그는 공교롭게도 어디 외출을 했거나 예전에는 단 한 번도 없었던 사고로 병원에 입원을 하는 등 그야말로 불운이 붙어다닌다는 인상을 받게
되는 경우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 이 사람과는 이제 죽을 때까지 몇 번 만나지 못하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종의 미신처럼
말이다. 실제로 과거에 아무리 친했던 사람일지라도 죽기 전까지 몇 번이나 만날 수 있을까, 생각하면 괜히 쓸쓸해지곤 한다.
시인 김정한의 신작 에세이 <새벽 2시에 생각나는 사람>을 읽으며 문득 쓸쓸해졌다. 만나고 싶었던 사람을 만나지 못한 채 돌아설
때처럼. 시인의 삶과 사랑에 대한 오랜 고민을 시가 아닌 산문으로 털어놓은 이번 작품에서 나는 왠지 모를 쓸쓸함과 더불어 시인이 겪고 감내해야
했던 고통의 옹이를 억지로 만져본 듯한 느낌을 받았다. 누군가 곁에서 아무것도 아닌 일로 쿡 찌르기만 해도 어린애처럼 금세 '왕'하고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어쩌면 나는 그렁그렁 눈물이 괸 눈으로 책을 읽어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먹먹해진 가슴으로.
"풍화된 시간을 돌아서 갈 즈음에는 동행할 누군가가 있으면 좋겠어요./ 실망과 절망을 되풀이 하다
낡아버린 생각들이/ 서로 부딪치다 대숲에서 울어도/ 그리움이 파내려간 미로를 더듬어 인연의 출구에 도착하겠지만/ 누군가 나보다 먼저 도착했으면
좋겠어요./ 힘겨운 순례의 길이 멈추지 않도록 단 한 사람이 동행했으면 좋겟어요./ 그 사람이 당신이었으면
좋겠어요." (p.102)
며칠 전 친한 친구 한 명이 나를 만나기 위해 평일 오전에 차를 몰아 서울에서 내가 있는 이곳까지 내려온 적이 있었다. 깜짝 놀란 나는
그의 손을 반갑게 잡았지만 우리는 이렇다 저렇다 별 이야기도 없이 그저 점심을 같이 먹었고, 늘 테이크 아웃을 하던 커피숍에서 익숙치도 않은
에스프레소를 주문하였고, 관상용인 듯 그저 쳐다보기만 할 뿐 마시지는 않았고, 약속이나 한 듯 일어섰고, 주차장까지 배웅을 나가겠다는 나를
친구는 굳이 등 떠밀어 돌려세웠고, 친구는 그렇게 말도 없이 가버렸다. 그리고 그 날 다 늦은 시각에 걸려온 친구의 전화, "잘 올라왔어. 얼굴
보니까 좋더라." 하는 싱거운 말에 나는 그저 기분이 좋았었다.
"꼭 당신을 만나야겠다고 노력한 적은 없어요./ 그러나 어느 날 당신이 내 앞에 서 있었어요./ 당신을
사랑하겠노라 죽어라 애쓴 적도 없어요./ 어느 날부터인가 난,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어요./ 일부러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한 적 없어요./
그저 난 당신에게, 당신은 나에게 서서히 물들기 시작했으니까요." (p.316)
관계는 의도하지 않는 어떤 순간에 맺어지고, 인연은 또 보이지 않는 어떤 시간에 깊어지는가 보다. 얼굴만 잠깐 보고 돌아서도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 그런 인연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한참을 생각했다. 웅숭깊은 시인의 말에 상념이 깊어지는 하루였다. 언제였는지 누군가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모든 게 흐릿하고 뭘 해야 될지 모르겠다고. 나는 그때 이렇게 말해주었다. 그렇다면 잘 살고 있는 거라고. 미래가 확고하고
모든 게 선명하다면 그 사람은 사람이 아닌 로봇이거나 인생을 두 번 사는 뱀파이어가 아니겠느냐고.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슬픈 말은 '후회한다'는 말인 것 같아요./ 후회는 실수, 실패의 주인이기도
하니까요./ 그 의미를 알면서도 '후회한다'는 행동을 하게 되니까요./ 아마도 완벽하지 못해서 그렇겠죠?"
(p.194)
괜히 우울하고 어깨가 움츠려드는 이유는 '세상에 오직 나 한 사람만 ……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의 마음 때문이다. 나 또한 다르지
않다며 조용히 손 잡아 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내 얘기에 귀 기울여 줄 사람이 곁에 있다면 세상의 공기는 지금보다 한결 따뜻해질
것이다. 세상의 그대에게 가장 훌륭한 위로는 그대를 향한 조용한 미소라는 걸 누군가 알아줬으면 좋겠다. 어쭙잖은 충고가 난무하는 요즘, 들꽃처럼
순박한 미소와 어깨에 얹히는 가벼운 손길이 세상을 향한 따뜻한 위로임을 시인은 이 책에서 말하려 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