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인 척 - 슬프지 않은 척, 아프지 않은 척, 혼자여도 괜찮은 척
이진이 글.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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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낮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폴짝 뛰면 마치 손이라도 닿을 듯 말입니다. 요즘은 사흘돌이로 비가 내리는 통에 계절을 가늠하기가 정말 힘들어졌습니다. 마치 여름 장마가 가을로 옮겨 온 것처럼 말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흐리고 이따금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엔 시간이 지겹도록 천천히 흐른다는 것입니다. 하루의 길이가 족히 1.5배는 길어진 듯하고, 낮도 밤인 것 같고, 밤도 낮인 듯하여 해야 할 일에 도통 갈피가 잡히지 않습니다. 저만 그런가요? 그래도 다행인 것은 오늘 기대도 하지 않고 펼쳐 들었던 책이 기대 이상이었다는 것입니다. '헐, 대박!' 소리가 절로 나왔습니다.

 

"나이를 먹으면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나쁜 사람이 소설이나 영화에서처럼 어느 날 갑자기 착한 사람이 되는 일은 없다는 것을. 사람은 쉽게 변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99% 노력과 1%의 재능을 가지고도 때로는 재력 한 가지로도 쉽게 얻어진다는 것을. 머리 똑똑한 가난한 집 자식보다는 수천만 원짜리 족집게 과외를 듣는 머리 나쁜 아이가 더 높은 점수를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내일부터 할 거야'하며 미루던 모든 일은 내일이 되어도 못한다는 것을." (p.26)

 

어느 리뷰에서도 쓴 적이 있습니다만 저는 이렇게 글과 그림이 뒤섞인 짧은 글들로 엮인 책을 그닥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였을 테지만 별반 기대도 없이 책을 펼쳤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저도 모르게 책에 깊이 빠져들었던 것이지요. '세상을 살 만큼 산 사람은 어떻게 글을 써도 연륜이 묻어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지요. 저는 비록 작가의 나이도, 이력도 알지 못하지만 세상 경험이 많은 사람이구나, 하는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독자의 마음을 끄는 책이나 글은 재능만으로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단골 죽집에 한동안 못 간 게 미안해서 다른 길로 멀리 돌아서 다니고는 한다. 지하철에서 옆 사람이 졸면서 기댈 때 밀어내면 그 사람이 민망해 할 게 미안해서 그냥 참는다. 6개월째 다니던 한의원. 병이 안 낫는 게 미안해서 다 나았다고 거짓말하고 다른 한의원으로 간다. 나는 몇 살 때부터 이렇게 살았던 걸까?" (p.138)

 

책의 내용은 이처럼 짧은 글과 그림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았습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쉬운 말들로, 흔히 겪는 소소한 일상 속에서 이처럼 깊은 울림을 주는 글을 쓰기란 말처럼 쉬운 게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저로서는 작가에게 그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죽하면 저는 작가의 블로그에 들러 이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될 거라는 근거도 없는 추측성의 멘트를 댓글을 남겼을까요.(http://oldrabbit804.com/220530837484) 저야말로 나잇값도 못 하는 주책없는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저처럼 나잇값 못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작가의 블로그를 다녀갔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자신이 느끼는 호불호의 경계가 점차 희미해진다는 걸 알게 됩니다. 싫은 일도 하게 되고 좋은 일도 포기하면서 세상에 나도 모르게 길들여지면서, 선명했던 자신의 감정을 경계가 없는 회색으로 색칠하면서, 누구나 다 그렇게 산다며, 나만 그렇게 사는 게 아니라고 자신을 위로하면서 우리는 어느 순간 어른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또는 '어른인 척' 행동했는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아침마다 들려오는 엄마의 잔소리와 6개월째 낫지 않는 역류성 식도염 때문에 힘들고 카드값으로 펑크 난 월급 때문에 짜증나고 늦게 일어나 회사에 도 지각해서 짜증나고 징검다리 휴일 우리 회사만 안 쉬어서 짜증나지만 그래도 늘 감사한 이유는 그보다 더 큰 걱정이 없다는 것이다." (p.274)

 

닉네임은 늙은 토끼, 좌우명은 '아님 말고'라는 이진이 작가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오늘처럼 우울이 바닥까지 끌리는 날도 가벼운 마음으로 거뜬히 버텨낼 것 같습니다. 세상 무서울 게 없다는 듯 호기롭게 걸을 것 같습니다.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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