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 일상의 여백 - 마라톤, 고양이 그리고 여행과 책 읽기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진욱 옮김 / 문학사상사 / 1999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책에서 읽게 되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도무지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작가의 애기라고 예외일 리 없다. 아무리 심각한 이야기를 할지라도 '뭐, 그럴 수도 있지.'라거나 '음, 그렇군.'정도의 반응만 보일 뿐 '설마, 그럴 리가?' 하는 식의 호들갑은 떨지 않는다는 말이다. 내 손에 난 상처가 아니어서 아픔을 느낄 수가 없다고 말한다면 내가 너무 야박하다고 힐난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책에서 읽는 이야기는 대부분 작가 자신이 직접 겪은 일이라고는 해도 다 지난 옛일일 뿐이고 지금은 어느 누구보다 행복하게 잘살 수도 있는 일 아닌가. 게다가 힘든 일을 겪던 그 당시에도 작가는 힘들다고 느끼지 않았을 수도 있고. 사실 그런 이야기를 읽으면서 눈물을 철철 흘린다는 것도 조금은 주책맞아 보인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는 사람 중에는 그가 쓴 소설보다는 에세이를 더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종종 만나게 된다. 사실 하루키의 에세이는 주변 풍경을 스케치하듯 가볍게 쓰거나 마치 남의 일인 양 쿨하게 쓰는 경우가 다반사여서 땀으로 젖은 옷이 척척 감기는 듯한 끈적끈적한 수필만 읽어 왔던 독자들은 마치 신세계를 만난 듯 '유레카!'를 외치곤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옆집에서 외치는 '유레카!' 소리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면 하루키의 팬이 한 명 더 늘었다는 얘기일 수 있다.

 

하루키의 에세이를 즐겨 읽는 한 사람으로서 나는 <하루키 일상의 여백>을 특히 좋아한다. 자신의 사생활이 드러나는 걸 극도로 꺼려하는 까닭에 인터뷰도 자제하는 그이지만 이 책에서 작가는 자신의 사생활을 비교적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글쓰기와 마라톤, 여행과 재즈, 고양이에 얽힌 이야기 등 남들과 다를 바 없는 일상의 이야기들을 솔직하게 드러낸 에세이 모음집이다. 작가는 <태엽 감는 새>를 집필하던 시기에 보스턴 근교의 대학 마을 케임브리지에서 보낸 2년 간의 생활을 이 책에 담고 있다.

 

"그건 그렇고 지금까지도 세상 사람들은 작가에 대한 일반적인 선입견 같은 걸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작가라는 작자들은 밤을 새우기 일쑤고, 줄창 단골 술집에 드나들면서 술이나 퍼마시고, 가정은 거의 돌보지 않으며, 게다가 지병(持病) 하나둘쯤은 누구나 갖게 마련이고, 원고 마감일만 되면 호텔 같은 곳에 틀어박혀서 머리칼을 마구 쥐어뜯고 있는 족속이라고 믿는 것 같다." (p.16)

 

'밤에는 대개 열 시에 잠자리에 들고, 아침에는 여섯 시에 일어나 매일 조깅을 하며, 한 번도 원고 마감일을 넘긴 적이 없다는 그는 우리가 갖고 있음직한 작가에 대한 신화적 이미지를 여지없이 깨트리지만 일시적으로 디아스포라의 삶을 선택하는 그의 내면에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는 듯하다. 불건전한 영혼의 정화를 위해 풀코스 마라톤에 도전하는 것하며, 이웃집 고양이 코타로 이야기, 자동차를 도둑맞고 되찾기까지 고생한 이야기, 중국과 몽골을 여행할 때 곤혹스러웠던 중국 음식 알레르기, 그리고 소설 쓰기와 좋아하는 작가들의 책 이야기 및 재즈와 영화 이야기 등 일상의 소소한 것들에 대하여 작가는 애정을 담아 풀어놓는다. 나는 이 책에서 이따금 일상으로부터 벗어난 듯한 여유와 자유로움을 느끼곤 한다.

 

작가는 미국 생활에서 겪었던 소소한 즐거움들, 이를 테면 통신 판매를 통하여 구입했던 빨래 건조대와 고양이 손목시계, 대학 동료로부터 처음 배운 스쿼시, 결혼 전 힘들었던 시기를 같이 견딘 고양이 피터에 대한 추억 등 세계 어느 곳에서도 있을 법한 이야기를 가볍게 쓰다가도 어느 순간 문득 진지해지곤 한다.

 

"때때로 문득 혼자서 살아가는 것은 어차피 지기 위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이 정말 피곤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나름대로 힘껏 살아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개인이 개인으로서 살아가는 것, 그리고 그 존재 기반을 세계에 제시하는 것, 그것이 소설을 쓰는 의미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p.74)

 

다른 에세이집과는 다르게 중간중간 일상의 모습이 담긴 원색 사진이 실려 있다. 그가 통신 판매로 구입한 목조 빨래 건조대며, 찰스 강 기슭의 갈매기,고양이 코타로, B.B. 킹의 콘서트 풍경 등 책에 실린 사진들은 글과 함께 작가의 일상을 보여주는 가벼운 터치처럼 신선한 느낌을 준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에서 나는 특별히 깊은 인상을 받았다.

 

시간은 조용히, 그리고 쉬는 일도 없이 흘러가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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