볕이 좋았다.

거저 주어진 볕이건만 허투루 흘려보내기엔 아까운. 내가 어렸을 때 오늘처럼 볕이 좋은 날이면 어른들은 언제나 '아이고, 아까워라. 아이고, 아까워라.' 연발하며 그 좋은 볕에 뭐라도 해야 할 것처럼 발을 동동 구르곤 했었다. 나는 그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오히려 '오늘만 날인가, 내일도 있고 모레도 있는데 웬 호들갑이람.' 속으로 한심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러나 나도 이제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보니 그때 하셨던 어르신들의 말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오늘처럼 볕이 좋은 날이면 딱히 해야 할 일이 있는 건 아니지만 괜스레 맘이 바빠지는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온종일 볕이라도 쪼이고 싶고, 옛친구라도 불러 하루 종일 햇빛 속을 함께 거닐고도 싶다.

 

이상의 수필 <권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해는 100도 가까운 볕을 지붕에도 벌판에도 뽕나무에도 암탉 꼬랑지에도 내리쬔다."

 

"나는 아침을 먹었다. 할 일이 없다. 그러나 무작정 널따란 백지 같은 '오늘'이라는 것이 내 앞에 펼쳐져 있으면서 무슨 기사記事라도 좋으니 강요한다. 나는 무엇이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연구해야 한다."

 

나는 봄볕 가득한 오늘의 여백을 앞에 두고 이상처럼 일망무제의 권태를 느꼈던 것은 아니지만 청명한 하늘과 찬란한 봄볕을 보며 말할 수 없는 욕심이 일었던 것이다. '아깝다'하며 나직이 옛 어른들의 흉내를 내는 것도 따지고 보면 나의 욕심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이상의 <권태>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이런 대목은 정말로 '이상 답다'는 생각이 든다.

 

"소의 체구가 크면 클수록 그의 권태도 크고 슬프다. 나는 소 앞에 누워 내 세균같이 사소한 고독을 겸손하면서, 나도 사색의 반추는 가능할는지 몰래 좀 생각해 본다."

 

올 봄에는 맘에 드는 '한국 단편 소설' 몇 편 골라 읽어야겠다 생각했었다. 그러나 오늘처럼 봄볕 좋은 날에 나는 '이상'의 수필이 문득 떠올랐다. 이상의 소설과는 달리 그의 수필은 소탈하면서도 사실적이다. 이상의 시와 소설에 비하면 그의 수필은 찾아 읽는 이가 드문 편이다. 예나 지금이나 시인이 쓴 수필은 감칠 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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