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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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날 때면 자주 들르는 도서관이 있다.

몇 년째 하루가 멀다 하고 뻔질나게 드나들었더니 도서관에 근무하는 직원들 대부분이 낯이 익어 마주칠 때면 가볍게 인사를 나눌 정도의 사이가 되었다. 나에게 있어 도서관은 일종의 놀이터요, 스트레스 해소처인 셈이다. 엊그제 도서관에 들렀을 때 나는 2층 자료 열람실에서 근무하는 여직원을 로비에서 만났다. 얼마 전에 출산휴가를 다녀온 까닭에 한동안 보지 못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분은 또 다시 배가 불러 있었다. 혹시 내가 잘못 알고 있었나 싶어 물었더니 그게 벌써 일 년 전의 일이란다. 그리고 출산을 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예정에도 없는 임신이 되는 바람에 또다시 출산휴가를 써야 할 처지라며 멋적게 웃었다.

 

그분과 헤어져 집으로 가는 길에 도리스 레싱의 소설 <다섯째 아이>가 문득 떠올랐다. 도서관을 찾는 사람들 모두에게 친절하고 환한 웃음으로 대하는 그녀는 왠지 모르게 <다섯째 아이>의 등장인물 해리엇과 무척이나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7년 88세의 늦은 나이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는 도리스 레싱은 그녀의 이력만큼이나 다양한 장르의 책을 출간했지만 우리에게는 그닥 친숙한 작가라고는 생각되어지지 않는다. 번역된 작품도 많지 않지만 우리 정서와 사뭇 다른 작품도 많기 때문이다. 그 중 그녀가 1988년에 선보인 <다섯째 아이>는 1960년대의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당시의 젊은이들과는 다르게 보수적인 성격의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직장 파티에서 우연히 만나 결혼한다. 그들은 런던 외곽의 소도시에서 빅토리아풍의 다락이 딸린 삼층집을 계약한다. 젊은 두 남녀의 수입으로는 벅찬 집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섯 명쯤 아이를 낳고 친척들로 떠들썩한 집안을 상상하며 행복해 한다.

 

루크, 헬렌, 제인, 폴 등 아이들이 줄줄이 태어나고 매년 부활절과 크리스마스에는 해리엇과 데이비드의 가족들이 모두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데이비드의 부모님은 이혼 후 각자 재혼을 하였지만 데이비드와 해리엇을 위해 금전적인 도움을 아끼지 않았고, 아이들 양육에 힘들어하는 해리엇을 돕기 위해 과부인 그녀의 친정 어머니 도리스는 그들의 집에 머무르면서 아이들을 돌본다. 적어도 다섯째 아이 벤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그들이 꿈꾸었던 가정과 행복을 다 얻은 듯했다.

 

다섯째 아이 벤을 임신했을 때부터 해리엇은 아이의 극심한 태동 때문에 힘들어했다. 진정제를 먹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태동이 심했던 아이는 달을 다 채우지 못하고 태어났다. 그러나 미숙아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남다른 신체발육과 엄청난 식욕, 이질적인 소통 양식 때문에 가족들과 동화되지 못한다. 아이는 가족 모두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고, 그 아이로 인해 가족 구성원들 간에는 금이 가기 시작한다.

 

가족의 화합을 파괴하고 증오와 공포의 대상이 된 벤. 결국 벤은 데이비드 어머니인 몰리의 권유로 요양원에 보내지고 해리엇도 이에 반대하지 못했다. 그러나 해리엇은 벤을 포기할 수 없었고, 비가 오는 어느 날 남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벤이 있는 요양원을 찾아간다. 구속복을 입고 축 늘어져 있는 벤을 차마 요양원에 그대로 두고 올 수가 없어서 해리엇은 벤을 집으로 다시 데려온다.

 

"자신이 속한 사회가 신봉하고 지지하는 가치관으로 판단해 볼 때 그녀는 벤을 그 장소에서 데려오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살해당하는 것으로부터 그 애를 구했기 때문에 그녀는 자기 가족을 파괴했다. 그녀의 인생에 해를 끼쳤다……. 데이비드의 인생…… 루크와 헬렌과 제인, 그리고 폴의 인생에도. 특히 폴의 경우가 가장 나빴다."    (p.158)

 

벤이 다시 집으로 돌아오자 다른 가족들은 벤을 피해 달아난다. 루크와 헬렌은 기숙사가 딸린 학교로 진학하고, 제인은 외할머니인 도로시에게, 그리고 남편 데이비드는 일 때문에 귀가가 늦거나 종종 집을 비웠다. 어려서부터 충분한 사랑과 돌봄을 받지 못했던 폴은 점점 더 신경질적으로 변하고 급기야 정신과 치료를 받기에 이른다. 벤이 학교에 입학하고 상급학교에 진학하면서 벤은 불량배들과 어울리기 시작한다. 이제 행복한 가정을 꿈꾸며 그들이 장만했던 대저택은 벤이 데려온 패거리들의 아지트로 변한다. 데이비드와 해리엇은 저택을 팔고 작은 집으로 이사할 결심을 한다. 패거리들과 어울리며 갖가지 범죄를 저지르는 벤을 보며 해리엇의 기대는 절망으로 바뀐다. 그러나 벤의 장래에 대한 걱정보다는 오히려 패거리들과 함께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처지가 되었다.

 

"그 갱단은 여전히 도둑질로 먹고 살 것이고 언젠가는 잡힐 것이다. 벤도 잡힐 것이다. 경찰에 잡히면 그는 분노를 제어할 수 없어서 싸우고 고함치고 발길질하고 괴성을 지를 것이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그를 약으로 마취시킬 것이며 머지않아 죽어가던 그를 그녀가 발견했을 때 모습처럼 수의를 입고 창백하게 축 늘어진 거대한 굼뱅이 같은 상태가 될 것이다."    (p.178)

 

행복했던 한 가정에 태어난 이질적인 존재 벤. 그것은 어쩌면 현대인의 마음 속에서 자라는 막연한 불안과 공포의 집약체이자 가상의 존재일지도 모른다. 어느 날 가족의 품으로 뚝 떨어진 괴물과도 같은 이질적인 존재로부터 자신들의 행복을 지켜낼 수만 있다면 그가 어떻게 돼도 좋다는 식의 이기심, 그들과 다른 한 아이의 탄생만으로도 영원할 것 같았던 가족의 결속력이 한순간에 무너져버리는 가족 공동체의 허술함, 모성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사회적 인식과 차별의 딜레마. 그것은 어쩌면 갈수록 험악해지는 사회 환경과 그에 반하여 나날이 허약해지는 가족 공동체의 결속력에 대한 도리스 레싱의 경고가 아닐까 싶다.

 

나도 옛날 생각이 난다. 아내가 임신을 하고 출산이 가까워질수록 '혹시 우리 아이가 기형은 아닐까? 출산 과정에서 잘못되는 건 아닐까?' 등등 끊이지 않는 의심과 공포가 엄습했었다. 다행히 아이는 건강했고 지금까지 잘 자라고 있는 까닭에 장애가 있는 아이를 키운다는 것, 그들 가족이 겪는 고통에 대해 별 생각없이 지냈었다. 도서관 여직원과의 만남에서 시작된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에 대한 생각. 한참 전에 읽은 책이지만 리뷰를 통하여 내 생각을 한번쯤 정리하고 지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묘하게도 나는 형제자매 중 다섯째 아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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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5-04-08 21:58   좋아요 0 | URL
모성애는 위대하지만, 아이를 데려온게 올바른 판단인건지.... 개인주의 가족에 대한 경고이겠지요.
그저 건강하게 태어난것 만으로도 행복했을때가 있었죠^^

꼼쥐 2015-04-10 18:47   좋아요 0 | URL
저도 아들이 건강하게 태어난 것만으로도 무한 감사를 느꼈었는데 자라면서 다른 욕심이 하나둘 늘어나는 바람에 오히려 그때의 느낌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말았죠. 장애를 안고 태어난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심정을 조금쯤 이해할 것 같았어요.

낭만가롱 2015-04-08 23:19   좋아요 0 | URL
저한테 최고의 책들 중 하나예요^^ 지나가다 반가워서요 ㅋ

꼼쥐 2015-04-10 18:48   좋아요 0 | URL
아~~그러시군요.
도리스 레싱의 작품은 문장 자체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지만 그 내용은 시사하는 바가 크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