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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메리 앤 섀퍼.애니 배로스 지음, 신선해 옮김 / 이덴슬리벨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누군가의 편지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나는 금세 닿을 수 없는 어떤 그리움에 후루룩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아요. 다들 그렇지 않나요?
그래서인지 편지 형식의 문학 작품을 많이도 읽었던 듯합니다. 기억나는 것만으로도 고흐의 <반고흐, 영혼의 편지>, 헬렌 한프의
<채링크로스 84번지>, 안토니오 그람시의 <감옥에서 보낸 편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루시드 폴과 마종기 시인의 <아주 사적인, 긴 만남>, 서경식과 타와다 요오꼬의 <경계에서 춤추다>,
이중섭의 <이중섭의 편지와 그림들> 등 아련한 추억과 함께 떠오르는 책의 제목들이 그저 미소짓게 합니다. 아름다운
책들입니다.
우리가 서간체 문학에 감동하는 이유는 아마도 다양한 인간의 속성 중에서 사랑과 신뢰의 감정을 두드러지게 드러내기 때문일 것입니다.
진실되고 투명한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까닭에 다른 사악한 감정들이 감히 개입할 수조차 없는, 적어도 편지를 쓰거나 읽는 시간만큼은 그러한
감정들의 존재마저 부정할 수 있는 기회가 우리에게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편지가 갖는 순수한 고백성은 때로 글을 읽는 모든 이들의
마음을 적시고, 순박했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게도 합니다.
나는 편지글 자체로서의 수필뿐만 아니라 편지 형식의 소설도 좋아하는 편입니다. 진 웹스터의 <키다리 아저씨>나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기를 통과하는 상징과 같은 서간체 소설이라면 메리 앤 섀퍼의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은 봄날의 산책길에 우연히 만난 제비꽃처럼 귀엽고 앙증맞은 소설입니다.
채널제도의 건지 섬을 배경으로 씌어진 이 소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 점령되어 5년의 세월을 견뎌야 했던 건지 섬 사람들의
이야기를 편지글 형식으로 실감나게 그리고 있습니다. 여느 전쟁소설처럼 당시의 상황을 참담하거나 비극적으로 그리지 않고, 섬마을이라는 작은
공동체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소박하고 진실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사실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이 독자들의 사랑과 강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이유는 낯선 섬 이름과 파이 이름을 내세운 특이한 제목, 제2차 세계대전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씌어졌다는 점, 찰스
램, 제인 오스틴, 앤 브론테, 찰스 디킨스, 오스카 와일드 등 당대의 유명 작가와 그들의 작품이 이야깃거리로 등장한다는 점, 편지글 하나하나가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묘사되어 독자들로 하여금 지적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겠습니다.
소설 속 주인공인 줄리엣은 영국의 인기 작가이자 칼럼니스트입니다. 그녀는 어느 날 건지 섬에 사는 한 남자로부터 편지를 받게 됩니다.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이라는 독특한 이름의 문학회 회원이었던 그를 통하여 줄리엣은 다른 회원들과도 편지를 주고받게 되었고, 종전
이후 다음 작품의 주제를 정하지 못하고 있던 그녀는 편지가 지속되는 동안 건지 섬주민들의 삶과 문학회에 대해 강한 호기심을 느끼게
됩니다.
소설에는 그녀가 남자친구와 주고받았던 편지와 전보, 그녀의 절친한 친구인 소피와 소피의 오빠이자 줄리엣의 책을 출간한
스티븐스&스타크 출판사의 발행인 시드니와 주고받는 편지, 또 건지 섬 사람들 10여 명과 주고받는 168통의 편지가 등장합니다.
편지로만 이루어진 이 소설에서 독자들은 당시 사람들의 사랑과 우정, 생명의 위협 속에서 꽃피운 인간애, 나치 감시 하에서 삶의 의지가 되었던
문학회와 책을 통해 변화되어 가는 그들의 인간정신에 깊이 감동하게 됩니다. 특히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문학회를 만든 엘리자베스가
전쟁 중에 한 아이를 낳고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했던 이야기와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엘리자베스의 딸을 지극 정성으로 돌보는 주인공의 이야기에서
먹먹한 슬픔을 느낍니다.
이 책은 한 노년의 작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수십 년에 걸쳐 만든 소설입니다. 이 책의 저자인 섀퍼는 1976년에 방문했던 영국해협
채널제도의 건지 섬을 배경으로 책을 쓰겠다고 이야기했고, 수년에 걸친 조사기간을 거쳐 2000년경 집필 작업에 돌입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녀는<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의 집필을 끝내자마자 암 진단을 받았고, 마지막 정리 작업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조카이자
동화작가인 애니 배로스에게 마무리 작업을 도와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2008년 2월, 책이 출간되는 것도 보지 못하고 73세의 나이에
복부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자친구를 버리고 떠났던 소설 속의 주인공 줄리엣은 결국 건지섬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찾게 됩니다. 영국에 있던 줄리엣에게 건지 섬에서
처음으로 편지를 보냈던 도시 애덤스는 결국 그녀의 신랑이 된다는 해피 엔딩의 결말입니다. 자극적이지 않고 잔잔한 글이 고픈 날에는 이 소설이
어떨까 싶습니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최악의 겨울 황사가 물러간 오늘, 봄볕처럼 따사로운 오후에 나는 연애편지를 읽듯 이 소설을 읽었습니다.
"결혼을 이렇게 서두르는 게 꼴사나운가요? 내가 기다리기 싫어서 그래요. 지금 당장 시작하고 싶어요. 지금껏 살아오면서 나는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무사히 약혼하면 그걸로 이야기가 끝인 줄 알았어요. 결국 제인 오스틴이 만족한다면 누가 봐도 만족스러운 일일 테니
말이죠. 하지만 아니었어요. 이야기는 거기서부터 시작이에요. 앞으로 하루하루 새로운 줄거리가 되는 거고요. 어쩌면 내가 쓸 다음 책은
환상적인 신혼부부가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에 대해 알게 되는 것들에 관한 내용이 될지도 몰라요." (p.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