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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 4285km, 이것은 누구나의 삶이자 희망의 기록이다
셰릴 스트레이드 지음, 우진하 옮김 / 나무의철학 / 201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일본을 대표하는 여류작가 무라야마 유카의 소설 <별을 담은 배>에는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막내인 미키가 베란다에서 달을 구경하고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말합니다. 오늘 달님이 정말 예쁘다고. 그러자 언니인 사에가 다가와 '무슨 슬픈 일이라도 있느냐' 묻습니다. 미키는 아니라며 시치미를 떼고 사에는 혼잣말처럼 말합니다. 자신은 슬픈 일이 있을 때면 달이나 별, 꽃 같은 게 유난히 예뻐 보인다고 말이죠. 아주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인데 저는 이 대목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아마도 작가가 쓴 이 대목의 글에 깊이 공감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없이 기쁜 일 앞에서는 세상에 오직 나만 보이고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게 되는가 봅니다. 내 주위의 자연은 말할 것도 없겠지요. 그러나 금방이라도 가슴 속에서 푸른 물이 울컥울컥 배어날 것 같은 슬픈 일을 당하면 나란 존재는 금세 잊혀지게 마련이고 주변만 도드라져 보이게 되는 법이죠. 나란 존재가 먼지보다 더 작게 느껴질 때, 세상을 향해 뻗어 있는 마지막 밧줄마저 놓아버리고 싶은 기분이 들 때, 그런 쓸쓸하고 우울한 기분을 달래는 데에는 역시 주변에 있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말없는 자연의 품이 더 낫지 않을까 싶어요.
셰릴 스트레이드의 <와일드> 역시 모든 것을 잃고 방황하던 저자가 자연의 품에서 서서히 회복되는 과정을 솔직하게 기록한 책입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학대로 인한 부모님의 이혼과 엄마의 재혼, 그리고 짧지만 행복했던 가족들과의 추억. 그러나 엄마의 말기 암 판정에 이은 갑작스러운 죽음은 언니와 남동생, 양부와의 결별로 이어졌습니다. 절망에 빠진 저자는 열아홉 살에 혼인하여 무난한 결혼 생활을 유지했던 남편과도 이혼하고 삶의 나락으로 끝없이 추락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멕시코 국경에서부터 캐나다 국경 너머에 이르는, 4,000킬로미터가 넘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the Pacific Crest Trail : PCT)’을 홀로 걷겠다고 결심합니다. 장거리 도보 여행의 초보자였던 그녀가 PCT를 홀로 걷겠다고 결심한 것은 단순한 우연에서 비롯된 충동이었지만 그녀는 자신을 삶의 벼랑 끝으로 몰고갑니다.
"엄마는 죽었다. 편협한 성격에 혼자서만 과하게 낙천적이고 딸의 대학 진학도 신경써주지 않는 사람. 때로는 자녀들을 방치하고 마리화나나 피우는 사람. 나무숟가락으로 우리를 때리고 엄마라고 부르지 않고 이름을 불러도 상관없다던 사람. 엄마는 실패했다. 엄마는 실패했다. 나를 제대로 키우는 데 실패했다." (p.471)
9개의 산맥과 사막과 황무지, 인디언 부족들의 땅으로 이루어진 그곳으로 배낭 하나만 달랑 메고 떠난 그녀는 온갖 시련과 고통, 두려움, 외로움과 싸우면서 지나온 자기 삶을 반추하고 그 과정에서 잃어버렸던 것들을 하나하나 회복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의 마지막 끝에 선 그녀는 그 혹독했던 경험을 통하여 잃어버렸던 자신감을 회복하고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새로운 삶과 조우하게 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이나 스스로에게 저질렀던 후회스러운 일이나 다른 사람이 내게 저지른 후회스러울 행동들도 다 상관없었다. 나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사람이지만 이것 한 가지만은 굳게 믿었다. 이 황야의 순수함이 나를 구해줄 거라는 것." (p.255)
책의 표지에는 제목과 함께 ‘4285㎞, 이것은 누구나의 삶이자 희망의 기록이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저자가 걸었던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은 4,285킬로미터로 캘리포니아 주, 오리건 주, 워싱턴 주 전체에 해당하는 거리를 가로지르고 이 길에는 국립공원과 사막과 황무지와 시에라네바다 산맥과 열대우림까지 포함되어 있는 험한 길이었습니다. 일단 코스에 들어서면 1주일분의 식량과 갈아 입을 옷가지와 텐트며 침낭 등을 짊어진 채 걸어야 하고, 어떤 코스는 1주일치 식수를 챙겨야 하기도 했었죠. 저자는 스물여섯 살이었던 1995년에 이 길을 90일 간 걸었습니다. 등과 어깨가 짓무르고 발에 물집이 잡혀 피부가 벗겨지는 걸 감내하면서, 그리고 발톱이 여섯 개나 빠지면서 말입니다.
저자는 그 길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각기 다른 목적으로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을 걷는 많은 사람들, 그들로부터 물심양면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성추행을 당할 뻔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아무도 없는 길을 걸으며 외로움에 몸부림치기도 하고 돌아가신 엄마를 생각하기도 합니다. 자신을 스쳐 앞질러 간 어느 여행자가 뒤따라올 저자를 위해 일부러 음식물을 남겨 놓기도 하고, 야영지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와 하룻밤의 짜릿한 추억을 만들기도 합니다.
"PCT의 여정이 어렵고 고달파도, 이렇게 이곳에서만 만날 수 잇는 여러 종류의 선물을 만나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는 날은 드물었다. 마치 마법 같다고나 할까.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그리고 이렇게 달콤한 일들이 PCT에서 겪는 어려움들을 이겨낼 수 있도록 해주었다." (p.411)
1926년 한 여교사에 의해 탄생한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은 미국 서부를 관통하는 험난한 길입니다. 보급품을 제때에 조달받지 못해 위험에 처할 수도 있고, 방울뱀이나 곰과 같은 야생동물들로부터 습격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저자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도박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전문 산악인도 아닌 저자가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하게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돌아가신 엄마의 사랑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나는 내 인생을 마음대로 살아본 적이 한 번도 없단다." 말기 암 판정을 받고 며칠이 지난 후 엄마가 울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나는 항상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만 살아왔어. 언제나 누구의 딸, 엄마, 그리고 아내였지. 나는 나 자신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어."" (p.482)
텐트 속에서 그녀는 홀로 책을 읽고, 자연의 침묵 속에서 생각을 하고, 고통 속에서 그녀는 삶을 살아갈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녀는 결국 목표했던 코스를 완주했고 기적처럼 살아 돌아왔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매순간 삶으로부터 도전을 받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셰릴 스트레이드의 <와일드>는 어느 젊은 여성의 치열했던 삶의 기록이자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안타까운 과거에 대한 깊은 반성으로 읽힙니다. 그녀를 옭아맸던 과거의 실수와 응어리는 대장정의 고통 속에 풀어졌던 것입니다.
"나는 강으로 가 쪼그리고 앉아 얼굴을 씻었다. 여름도 다 가서 그런 걸까. 물길은 좁고 얕아서 그냥 강이 아니라 시냇물 수준이었다. 지금쯤 우리 엄마는 어디 있을까? 나는 엄마가 보고 싶었다. 오랫동안 엄마를 버리지 못했고 그 무게를 지고 비틀거리며 살아왔다. 엄마는 저 강 건너편에 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 순간, 내 마음속 어떤 것이 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p.540)
셰릴은 말합니다. "방법이 하나뿐이라는 건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언제나 그랬다. 그냥 계속해서 길을 걷는 것뿐."이라고. 영혼의 상처를 아물게 하는 것은 자연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셰릴이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을 계획한 것도 어쩌면 본능에 이끌린 그녀의 선택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육체의 고통은 다만 영혼의 고통을 잊게 하는 마취제일 뿐이겠지요. 나는 이 책 <와일드>를 읽으며 <별을 담은 배>의 주인공 사에를 생각했습니다. 슬픈 일이 있을 때면 달이나 별, 꽃 같은 게 유난히 예뻐 보인다는 그녀의 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