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에 대한 사전정보 없이 책을 읽는 버릇이 있다. 적어도 책에서 작가에 대한 힌트를 조금이라도 얻기 전까지는 말이다. 우리나라 작가의 작품이라면 어쩔 수 없이 알게 되는 경우가 많지만 고전이 아닌 이상 외국 작가의 작품은 일부러라도 작가 소개를 외면한다. 우연히 알게 된 작가라 할지라도 작가의 성별만큼은 철저히 가린 채 책을 읽어나간다. 십자말풀이를 하는 것처럼 작품 속에서 작가에 대한 정보를 찾아 작가의 성별이나 성격을 짐작하는 일은 의외로 재미있다. 일인칭 소설은 책을 몇 장 넘기지도 않았는데 단박에 알아맞추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삼인칭 소설은 조금 더 어렵다. 처음 접하는 작가에 대한 정보를 단순히 작품 속에서 찾아 맞추어 보는 재미는 책을 읽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백설공주에게 죽음을>도 그랬다. 작가에 대한 아무런 사전정보도 없이 책을 펼쳤다.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는 삼인칭 소설. 재미있겠는 걸. 몸속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러나 웬걸 얼마 읽지도 않았는데 슬슬 감이 오기 시작했다. 작가는 분명 여자라는 확신이 더욱 강해졌다. 과감히 생략해도 될 듯한 장면에서의 지나치게 세밀한 묘사와 일상적인 이야기들, 그리고 주인공 주변의 다양한 인물들. 책을 펼쳤을 때의 긴장감은 금세 사그라들고 말았다.
소설은 주인공 토비아스가 교도소를 출소하면서 시작된다. 그는 여자친구 둘을 죽였다는 죄목으로 교도소에서 10년을 복역했다.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못하는 게 없었던 토비아스는 새로 사귄 여자친구 스테파니(백설공주)와 예전 여자친구 로라를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채 단순히 정황증거만으로 진행된 재판에서 친구들과 마을 사람들 모두는 그를 외면했다.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의대를 진학하겠다던 그의 꿈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어젯밤에는 토비아스 자토리우스와 살해된 여자애들에 대해 생각하는라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로라 바그너와 스테파니 슈네베르거는 살해될 당시 지금의 아멜리와 같은 열여덟 살이었다. 그리고 지금 아멜리가 살고 있는 집은 살해된 여학생 중 하나가 살던 집이다. 아멜리는 티스가 '백설공주'라고 부른 여학생에 대해 자세히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알텐하인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p.40 ~ p.41)
토비아스가 출소한 후 폐쇄된 군 비행장의 지하 기름탱크를 철거하는 과정에서 로라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다 끝난 듯했던 사건은 또 다른 의문으로 재점화된다. 마을에서 농장과 식당을 운영하던 토비아스의 아버지는 그가 투옥된 후 어머니와 이혼하고 많은 빚을 진 채 절망감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고교시절 토비아스를 짝사랑했던 나디야는 이제 유명 배우가 되어 있다. 고향 마을을 떠나 자신의 집에서 사는 게 어떠냐는 나디야의 제안을 뿌리치고 토비아스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간다. 황폐화된 농장을 정리하며 아버지를 돕는 토비아스.
마을 사람들은 토비아스의 귀향이 반갑지 않다. 마을 사람들의 협박과 린치에도 불구하고 토비아스는 마을을 떠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마을에는 막대한 재산을 소유한 테를린덴 가문이 존재한다. 토비아스의 아버지도 그 집에 큰 빚을 지고 있다. 독일의 작은 마을 알텐하인은 테를린덴의 왕국과 다름없었다. 토비아스에게 우호적인 사람은 오직 외지에서 새로 이사온 아멜리가 유일했다. 당차고 용감한 아멜리는 열여덟이라는 나이와는 어울리지 않게 모든 행동에 거침이 없다. 자폐 증세가 있는 테를린덴의 둘째 아들 티스와 어울리면서 토비아스가 진범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게 된다.
토비아스에게 호감을 갖고 있던 아멜리는 티스가 그린 그림을 손에 넣게 되자 토비아스가 진범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티스는 그 사건의 목격자였다. 그림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던 티스는 그때의 사건을 사실적으로 세밀하게 그려놓았던 것이다.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된 아멜리는 토비아스에게 알리려 했으나 누군가에 의해 납치된다. 아멜리의 실종을 수사하던 경찰은 두 여학생을 살해한 진범이 따로 있음을 직감한다. 아멜리의 실종과 누군가에 의해 저질러진 토비아스 어머니에 대한 살인 미수 사건은 소설을 또 다른 국면으로 몰고간다.
이야기는 본론에서 번번이 벗어난다. 수사반장이었던 보덴슈타인의 가정사와 그와 콤비를 이루는 피아 형사의 이야기, 문화교육부 장관인 라우터바흐와 의사인 그의 부인, 그리고 테를린덴의 첫째 아들인 라르스의 이야기, 모든 것을 잃고 동네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는 토비아스와 토비아스를 소유하려는 나디야의 이야기가 끝없이 이어진다. 마치 우리네 일상이 늘 그런 것처럼.
오백 쪽이 넘는 책의 분량에 비해 사건의 결말은 너무도 쉽게 풀려버린다. 어쩌면 이것은 작가가 여자라는 데 원인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강한 집중력과 장시간의 인내를 요구하는 소설 집필은 체력 싸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 체력이 약한 작가는 소설이 끝을 향해 나아갈 때 급격히 무너지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성격이 급한 작가라면 어서 빨리 끝내고 싶은 욕심에 소설이 막바지를 향해 갈수록 조바심을 내게 마련이다. 그런 까닭에 결말 부분은 항상 허술하다. 이런 류의 소설을 읽을 때면 마치 다른 작가가 결말 부분만 대신 쓴 것처럼 여겨진다.
사건에 연루되었던 많은 사람들이 구속되고 주인공인 토비아스와 아멜리도 여러 어려움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구조된다. 사건의 뼈대를 이루는 기본 구조는 평이했다. 다만 작가는 알텐하인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욕심과 부와 권력에 눌린 소시민들의 비겁함, 짝사랑하는 연인을 향한 나디야의 집착을 여성 작가만의 섬세한 시선으로 잘 그리고 있다.
소설 전반에 등장하는 나디야라는 캐릭터는 공감하기 어려웠다. 토비아스를 사랑했지만 언제나 그의 관심 밖에 있었던 까닭에 소유와 집착에 대한 열망이 강해졌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성공한 여배우가 10년 형을 받고 초라한 모습으로 변한 과거의 연인에게도 과거와 같은 강한 열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과 열여덟 살의 아멜리가 10년 연상의 살인 전과자를 사랑할 수 있을까, 그것도 여러 번 만난 사이도 아닌데... 아주 쉽게 여성 작가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는 것과 소설 전반에 여성 작가 특유의 디테일이 살아 있었던 점에 만족해야 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