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힘없는 노인의 SOS 구조요청 이메일이라도 받았던 것인지 입추가 지나자마자 아침 저녁의 기온은 거짓말처럼 달라졌다. 사람들은 음력 절기의 신기한 효능에 대해 다들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자신이 마치 기후에 대한 새로운 이론이라도 발견한 것인 양 들뜨고 행복해 보였다. 자신의 아이들에게도 음력 생일을 고집한다는 어떤 이는 그것이 무슨 자신만 아는 우주의 원리를 아이들에게 교육시키기라도 하는 양 자랑스러워하기도 했었다. 나도 매년 음력으로 생일을 쇠는 처지에 반기를 들 수는 없는 일이었지만 뭔가 미심쩍은 마음을 지울 수는 없었다.

 

아무튼 그럭저럭 지낼 만한 날씨가 며칠째 계속되고 있다. 하느님께 이메일을 보낸 무명씨에게 감사의 인사라도 표해야 하겠지만 그의 이메일 주소도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속수무책 예의 없는 사람으로 남을 수밖에.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한 후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일을 하였고, 하루에 서너 번쯤 아버지를 생각했고, 이따금 죽음에 대해 성찰했다.

 

가족 중 한사람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우리가 겪는 불쾌한 경험은 정신병원에 입원하기 직전의 상태까지 스트레스 지수가 치솟는다는 것이겠지만, 반면 명절마다 의례적인 만남을 지속해왔던 자신에 대해 반성하고 삶과 죽음을 결부지음으로써 아주 잠시가 될지언정 끝없이 집착했던 자신의 욕망을 조금쯤 내려놓게 된다는 사실이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들었거나 책에서 읽었던 피상적인 경험과는 다르게 그 느낌은 실제적이면서 또한 직접적이다.

 

예컨대 평생을 술에 의지하여 자신 스스로도 제어할 수 없었던 가정 폭력의 덫에 빠져 살았던 아버지이지만 그 이면에 감추어진 당신의 정신세계는 얼마나 피폐했을까 하는 일말의 동정심을 나는 지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느끼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하찮을지 모르는 이러한 경험이 일견 소중한 듯 보이고 아버지에 대한 가족 모두의 켜켜이 쌓인 분노가 나와 같은 경험을 통하여 슬몃 사라지게 되었으면 바라는 것이다.

 

혹자는 나에게 더 일찍 마음을 터놓고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지 않았겠느냐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다. 상대적으로 쉬워보이는 일도 누군가에게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불가능한 일이 되기도 하는 법이다. 한번 틀어진 인생이 어느 날 갑자기 제자리를 찾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우리 가족 모두는 기대하지 않았고 당신 스스로도 아주 오래 전부터 포기한 채 살았을지도 모른다. 당신으로 인한 그 오래된 원망과 미움이 당신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야 조금씩 옅어진다는 사실에 나는 기뻐해야 하는 것인지.

 

국화 앞에서

       _ 김재진_

 

살아온 날 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은
사람들은 모른다
귀 밑에 아직
솜털 보송보송 하거나
인생을 살았어도
헛살아 버린
마음에 낀 비게
덜어내지 못한 사람은 모른다
사람 이라도
다 같은 사람 은 아니듯
꽃이 라도
다 같은 꽃은 아니다
눈부신 젊음 지나
한참을 더 걸어가야
만날수 있는 꽃
국화는 드러내는 꽃이아니라
숨어있는 꽃이다
느끼는 꽃이 아니라 생각하는 꽃이다
꺽고싶은 꽃이 아니라
그저 가만히 바라보는 꽃이다
살아 갈 날이
살아온 날 보다 적은
가을날
국화 앞에 서보면 안다
산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굴욕을 필요로 하는가를
어쩌면 삶이란
하루를 사는것이 아니라
하루를 견디는 것인지 모른다
어디까지 끌고 가야 할지 모를
인생을 끌고
묵묵히
견디어 내는 것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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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4-08-12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입추는 양력이에요.24절기는 모두 양력이죠.말복 초복은 24절기가 아니라 음력이고요.그래서 작년 입추는 올해와 똑같이 8월 7일인데, 말복과는 안 겹쳤어요.

꼼쥐 2014-08-13 15:00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
제가 말복이라고 썼어야 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