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큰 유리창이 있는 버스를 탔다
레이첼 사이먼 지음, 이은선 옮김 / 홍익 / 2004년 3월
평점 :
절판


한여름처럼 뜨거웠던 날씨가 뭉근하게 풀어지는 시간입니다.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감정의 기복이 심했던 하루였어요.  내 속에 감춰진 모든 감정들을 낱낱이 끄집어내서 주변 사람들에게 전시라도 하려는 듯 감정 절제가 맘처럼 되지 않았습니다.  날씨 탓이려니 하기에는 제 자신이 너무 초라해지고, 인간의 성숙도라는 게 고작 이것이구나 생각했었습니다.  레이첼 사이먼의 <세상에서 가장 큰 유리창이 있는 버스를 탔다>를 꺼내 읽었습니다.  오래 전에 후다닥 읽었던 탓에 마치 오늘 처음으로 읽는 책처럼 새롭습니다.  작가 레이첼 사이먼이 자신과 정신지체 장애가 있는 동생 베스의 이야기를 마치 소설처럼 담담하게 써내려간 이야기.

 

"내가 성인군자라면 얼마나 좋을까.  버스에서 처참한 가족사를 재현하는 베스에게 연민의 정을 느낄 만큼 마음이 넓은 언니였으면 좋겠다.  바꿀 수 없는 걸 순순히 받아들이는 평정심과, 바꿀 수 있는 걸 바꾸는 용기와, 둘의 차이를 알 만한 지혜가 있었으면 좋겠다.  베스가 저 정도인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베스가 운전기사 70명의 스케줄을 외우고, 인종차별주의자한테 당당히 맞서고, 글을 읽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좋겠다.  내 주변 사람들처럼 정신지체인은 신이 내린 천사라고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베스를 대하는 나의 태도가 달라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p.292)

 

레이첼에게는 언니 로라와 11개월 차이의 동생 베스, 남동생 맥스가 있습니다.  부모님이 이혼한 후 한동안 엄마와 함께 살았지만 엄마가 전과자인 남자와 재혼을 한 후 레이첼은 학교 기숙사로, 맥스와 로라는 아버지의 집으로, 그리고 베스는 엄마와 함께 떠돌게 됩니다.  가정폭력의 성향이 있던 엄마의 새 남편으로부터 간신히 도망친 베스는 다시 어버지에게 맡겨집니다.  베스를 차에 태우고 출퇴근을 하던 아버지는 그 기간이 길어지면서 점점 지쳐가고 어느 날 베스는 정신지체 장애인들이 모여 사는 공동주택으로 보내집니다.  그리고 가족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베스는 그곳을 나와 독립을 합니다.  베스가 하는 일이라고는 하루 종일 버스를 타고 마을을 여행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작가이자 대학 교수인 레이첼은 언제나 바쁜 생활입니다.  베스를 잊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딱 1년만 자신과 함께 버스 여행을 하자는 베스의 제안에 레이첼은 그렇게 하기로 결심합니다.       

 

"베스에게는 하루하루가 독립기념일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인생의 절반을 살기까지는 독립기념일과 거리가 멀게 지냈고, 이후로 인생의 4분의 3 지점까지는 흡사 반군(叛軍) 간은 삶을 살았다.  하지만 혼자 살기 시작한 이후로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모두에게 나름대로의 인생과 자유와 행복 추구권이 있다는 결의를 날마다 새롭게 다지며 살아가고 있다.  나는 베스의 이런 면이 좋다.  베스는 선택권의 횃불을 당당하게 지켜든 용감한 전사인 셈이다."    (p.227~p.228)

 

연인이었던 샘과 헤어진 후 느꼈던 외로움과 절망에서 비롯된 레이첼의 약속은 결코 녹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버스를 타는 베스를 뒤쫓는 것도, 버스에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베스를 이해하는 것도,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는 베스를 지켜보는 것도 레이첼에게는 버겁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나도 좋은 언니가 되는 가이드북을 언제나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으면 좋겠다.  진정한 자립심이 무언지 가르쳐줄 수 있게.  아끼는 마음과 구속하려는 마음 사이에 경계선을 확실히 그을 수 있게."    (p.237)

 

38살인 베스는 버스 여행을 통하여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우정을 나눕니다.  때로는 그녀를 무시하는 승객들과 언성을 높이며 다투기도 하지만 베스는 신경쓰지 않습니다.  버스 노선과 스케줄을 외우고 자신을 좋아하는 버스 기사를 기억하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버스를 갈아탑니다.  베스와 동행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레이첼도 그들과 친구가 됩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버스 기사는 베스에게도, 레이첼에게도 삶의 진실을 가르쳐주는 스승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친구와 함께 배꼽을 쥐며 웃고 있는 베스의 얼굴을 쳐다본다.  베스는 지금까지 많은 절망과 공포를 겪었지만 자기연민의 표정을 지은 적은 없다.  단 한번도 그 비슷한 표정조차 지은 적이 없다.  그래.  자기연민부터 없애기 시작해야겠다."    (p.315)

 

"파란 버스의 주인공 멜라니는 오래전에 가까운 친구를 교통사고로 잃은 적이 있다고 말한다.  조금 전까지 통화를 했던 친구인데, 30분 만에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앞으로 10분 뒤를 짐작할 수 없는 게 인생이에요.  나만 하더라도 저 모퉁이를 돌면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걸요?  그러니까 친구가 되자 이거예요.  많이 베풀며 살자 이거예요."  나는 그 말을 내 기억의 수첩에다 적는다. '모퉁이를 돌면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게 인생이다.'  멜라니의 말이 다시 뇌리를 때린다.  내가 먼저 누군가의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그 말이."    (p.317) 

 

언니라는 이름은, 혹은 가족이라는 단어는 처음부터 그 말 속에 사랑을 담고 있었던 것은 아니겠지요.  어쩌면 우리는 불편하다는 이유로, 바쁘다는 핑계로, 그 말 속에 마땅히 담겨야 할 사랑을 철저히 외면하며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렸을 때 그랬던 것처럼 레이첼은 어른이 된 베스의 몸을 간지릅니다.  아주 오래 전에 잊었던 사랑을 다시 불러오려는 것처럼.  나도 어쩌면 아주 오래 전에 잊었던 가족 간의 사랑을 영영 멀리한 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잊혀진 사랑을 되찾기 위해 나도 언젠가는 낡은 버스를 타고 익숙한 거리를 하루 종일 돌아야 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베스와 레이첼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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