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와 다를 바 없이 아침 운동을 나서다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밤새 뭔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주차해 놓은 차량의 유리에는 온통 알 수 없는 무늬들이 얼룩져 있었다. 잠들기 전, 그러니까 자정이 넘은 시각에 잠시 외출을 했던 나는 그 시각까지 하늘에선 그 어떤 것도 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내가 잠들었던 새벽녘의 짧은 시간 동안 비인지, 눈인지, 그 중간쯤의 어떤 것이었는지가 소리도 없이 내렸다는 얘기다.
산을 오르는 입구에는 침목을 박아 놓은 계단이 있다. 그 계단 위도 하얗게 얼어 붙은 알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산의 중턱에 있는 묏등에도, 낙엽이 쌓인 숲 언저리에도 비인지, 눈인지, 중간쯤의 그 무엇인지가 하얗게 쌓여 있었다. 4월이라는 날짜 관념이 무색해졌다. 분홍빛 진달래의 눈인사도 오늘따라 차갑기 그지없다. 산에는 이제 제법 나뭇잎 티가 나는 새순들이 저마다의 빛깔로 치장하고 있다.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좁쌀만한 새순이 겨우 움을 틔웠었는데... 끝내 닭이 되지 않을 듯하던 병아리들이 어느새 중닭이 되어 나타나 어미닭 흉내를 내는 것처럼 뾰족한 새순은 어느새 그럴 듯한 나뭇잎이 되었다.
산의 능선에 있는 운동 기구와 나무 의자도 온통 얼어 있다. 윗몸일으키키대도, 철봉도, 평행봉도... 결국 나는 조금 더 걷기로 한다. 이렇게 오래도록 걷는 날에는 한동안 잊고 지내던 것들이 떠오르곤 한다. 언젠가 친구가 했던 말 중에는 이런 것들이 있다.
"삶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슬픔 뿐이야. 기쁜 일, 기쁘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은 시답잖은 일들은 그저 삶의 양념에 불과해. 그런 것들은 쉬이 잊혀질 뿐더러 오래 기억할 가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해. 우리가 삶의 경험에서 삼키는 것은 오직 슬픔 뿐인 셈이지. 그래서 우리는 태어날 때도, 죽을 때도 눈물을 흘리는 거야. 처음과 끝을 슬픔으로 채우는 것은 중간 과정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단적으로 증명한다고 볼 수 있지."
산을 내려올 때는 이미 해가 저만치 떠 있었다. 우듬지에서 녹은 물이 '후두둑 후두둑' 비처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