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의 여성 피의자와 초임 검사의 스캔들이 연일 언론에 회자되고 있다.

검사의 비리가 어제 오늘의 얘기는 아니지만 그것은 세간 사람들의 입방아에만 오르내릴 뿐 정식으로 사건화된 적도 없었고 그로 인해 처벌을 받거나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사람도  없었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그랬다.  그런데 이 무소불위의 권력도 점차 시들어가는지 최근에는 여기 저기서 검사의 비리 문제가 불거져 나오고 있고 비등한 여론 탓인지 검사가 구속되는가 하면 직위에서 자진하여 물러나는 사람도 있었다.  세상은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사건의 진위여부가 궁금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문제라면 나는 관심조차 없다.  검찰청에 근무하는 수사검사의 인권의식이 얼마나 높아졌는지는 모르겠으나 8,90년대의 검사들은 그야말로 안하무인이었다.  피의자가 일단 검사실에 호출되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강압적이고 공포스런 분위기에서 조사를 받아야만 했었다.  언제였는지 정확한 날짜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나는 절도 혐의로 끌려온 어느 노인이 새파란 검사로부터 벽 보고 꿇어앉으라는 명령을 듣고도 분노하기는커녕 파랗게 질려 검사의 명령에 고분고분 따르는 모습을 내 눈으로 직접 목격하기도 했었다.  결국 인권의 향상은 제도의 문제에 앞서 사람의 의식이 각성되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나는 검찰개혁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우리나라와 같은 경쟁적 교육구조에서 성장한 사람들은 제도가 조금 바뀐다고 하여 배려나 관용, 정의와 사랑 같은 정신적 사고가 깊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서론이 길었다.  그럼에도 내가 이 글을 쓴 이유는 뉴스에서 보도되었듯이 30대의 초임 검사가 10살 이상 연상인 40대의 여성 피의자를 상대로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이다.  얼핏 생각하면 뭐 하나 부족할 것 없어 보이는 검사가 그것도 젊은 여성이 아닌 40대의 피의자를 상대로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맘만 먹으면 젊고 매력적인 여자와 정상적(그가 유부남이라면 어떤 경우에도 정상적이지 않겠지만)인 관계를 가질 수 있을 텐데 검사로서의 첫발을 내디딘 시점에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하필이면 왜 그 여인을 탐했을까? 하는 다분히 속물적인 호기심이 강하게 일었다.  그 검사나 여성 피의자를 비하하거나 인신공격할 의도는 전혀 없다.  다만 이것은 내 개인적인 궁금증일 뿐이다. 

내가 제시한 문제의 해답은 당사자만이 대답할 수 있겠지만 내가 추측하기로는 그 여성이 상당히 매력적이었거나, 해당 검사가 성도착증적 병리 현상을 갖고 있거나, 그도 아니면 지금껏 내려온 관행을 초임 검사가 굳게 믿었거나일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그 검사는 자신의 행위가 세간에 알려질 수 있다는 가능성조차 믿지 않았을 것이다.  감히(?) 대한민국 검사에게 그깟(?) 일로 책임을 묻는 경우는 지금까지 없었으니까.

 

어제는 올해 수능을 본 아이들 중 두 명의 남학생이 내 숙소를 방문했었다.  10시도 넘은 늦은 시각이었다.  수능이 끝나자마자 아르바이트를 시작해서 첫월급을 받았다고 했다.  내 숙소에서 공부하는 후배들도 생각났고, 1년 동안 자신들의 공부를 도와준 나도 생각났다는 거였다.(짜식들, 기특하기는)  손에는 먹을 게 잔뜩 들려 있었다.

 

어제 그 애들이 내게 한 질문은 '사회 생활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을 믿어야 하는가?  그리고 그 기준은 무엇인가?'하는 것이었다.  나는 위에 적은 검사의 스캔들을 접하고 내가 느꼈던 속물적 궁금증을 들먹이며 그들에게 말했다.  자신의 단점이나 과오를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나는 이번 대선에 그런 사람에게 투표할 생각이다.  지난 정권의 잘못을 과감히 파헤치고 죄가 있다면 엄격하게 책임을 지도록 하는 그런 사람을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뽑고 싶은 것이다.  해방 이후 수많은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뽑았지만 이제껏 그런 사람은 없었다.  혹시 모를 자신의 죄과도 들추어질까봐 지난 정권의 과오는 언제나 슬쩍 덮어주고 지나갔었다.  그것을 '화해와 용서'라는 포장으로 감싼 채.

 

우리는 그런 과거 때문에 우리 사회의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의 공로조차 불신하게 되었다.  이러한 불신 풍조는 사회 전반에 팽배하다.  허물을 감춘 채 공로만 말하는 사회.  주변에서 그런 사람을 만난다면 그들을 진심으로 믿을 수 있을까?  '공은 공이고 과는 과다.'라는 명제를 진심으로 믿게 하려면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이 먼저다.

 

알랭 드 보통은 자신의 저서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사가 우리에게 얼마나 유리하게 돌아가는지를 자랑할 때, 우리는 정작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둔감하게 된다.  우정이라는 것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일이나 후회하는 일에 대해서조차도 감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때에만 비로소 자라날 기회를 얻는다.  그 외의 다른 이야기는 단지 쇼맨십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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