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책의 목록을 빼곡히 적다 보면 내가 참 바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마음 속에는 그 많은 책들을 품고, 그저 동경하며, 이제나 저제나 하며 그날(올지 안 올지 알 수 없는)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기 때문이지요. 독서는 우선순위의 맨 아랫줄을 차지하는 까닭에 오늘도 나는 그 목록만을 만지작거리며 한참을 서성입니다. 어느덧 습관으로 굳어버린 빛 바랜 목록들이 늦가을의 바람에 풀풀 날릴 때면 잊혀진 연인을 기다리듯 '무작정 기다리는' 대상이 나인지, 책인지, 책의 목록인지, 또는 그 모든 것인지 알 수 없는 지경에 빠지곤 합니다.
연약한 가을이 아파트 공사현장의 황폐한 벌판에서 살얼음을 걷듯 조심스럽습니다.
천변의 무성한 억새 위론 가을 햇살이 폭포수처럼 쏟아집니다. 나는 그 길을 오래도록 걸으며 새책의 첫장을 넘겼을 때의 먼 기억을 떠올립니다. 햇사과의 상큼한 육즙이 가슴을 다 적실 듯하던 그 가을의 어느 날이었겠지요. 어쩌면 지금처럼 가을의 끝자락, 또는 겨울의 처음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람이 숨어 드는 억새풀밭에 누워 한나절 책을 읽고, 햇살에 겨워 스르르 눈이 감겼었지요. 서걱이는 바람이 자장가처럼 길게 흐르고 그때의 하늘은 눈부시게 푸르렀습니다.
그리움이 밀려옵니다.
나를 찾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릴 듯하고, 천진했던 나를 하마면 잡을 듯 가깝습니다.
문득 파스칼 키냐르의 <은밀한 생>의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책의 지면이 신성한 영토인 까닭은, 그 위를 흐르는 공기가 그것을 읽게 만들고, 일상적인 방의 구태의연한 색깔을 단번에 영원히 바래게 하기 때문이다. 책의 지면은 셀 수 없는 시간이고, 그 시간의 흐름 자체는 붙잡을 수 없어서 한꺼번에 천년, 백년, 나이, 날짜, 시간을 저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