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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엘리자베스 길버트 지음, 노진선 옮김 / 솟을북 / 200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내 인생의 전반기 그러니까 학창 시절에 나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퍼즐조각의 조합 속에서 살았다. 극도로 궁핍한 가정 형편과는 달리 학교 성적은 늘 상위권에 머물렀고, 이러한 부조화는 아직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어린 나에게 어느 한 쪽으로의 극단적인 편중(심리적 쏠림 또는 치우침)을 경험하게 했다.
성적만으로 치자면 나는 또래의 친구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었고, 그들에게는 범접할 수 없는 우상과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일단 학교의 울타리를 벗어나면 인도의 하리잔처럼 친구들의 시야에서 슬금슬금 뒷꽁무니질을 해서는 냅다 달아나곤 했다.
이러한 부조화는 언젠가 나의 진짜 부모가 내 앞에 `짠’하고 나타나 궁궐같은 집으로 안내할 것만 같은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게 만들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으로 시작한 사업도 그럭저럭 자리가 잡혀가자 나는 학창 시절 내가 누렸던 행운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믿음에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내가 원했던 사람과 그렇게 결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나고 사업이 서서히 내리막길을 질주할 때조차 내가 하는 일에 실패는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고 나 자신을 세뇌시켰다.
그러나 보란 듯이 인생 1막의 커튼이 드리워지고 이어지는 암전.
시간은 조용히 흐르고 관객들이 다음 2막을 숨죽여 기다리던 순간에 나는 `연극은 끝났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내 인생에 2막은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핸들을 잡지 않은 광란의 질주가 한동안 계속됐고, 미친개에게 물리고 싶지 않았던 관객들이 뿔뿔이 흩어져 텅 빈 객석이 되었을 때 인생 2막의 커튼이 다시 열렸다.
이 책이 내 손 안에 들어온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마치 일어날 것은 반드시 일어나고야 마는 운명의 수레바퀴에 내 자신이 반쯤 매달린 듯한 기분으로 책을 읽었다.
작가 엘리자베스 길버트는 암울했던 순간에 자신을 추스리고 이탈리아, 인도, 인도네시아를 여행함으로써 인생에서 노련한 배우로 거듭나는 과정을 세세히 보여주고 있다.
자신이 나 아닌 다른 누군가의 대역배우로 사는 것을 과감히 포기하고, 자신 앞에 펼쳐진 인생의 주연으로 살고자 내면의 소리에 응답하는 길을 선택한다. 그렇게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직장을 그만두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뒤로 한 채 이탈리아, 인도, 인도네시아로 일 년간의 여행을 떠난다. 그녀에게 여행은 상처난 영혼을 치유하는 치료의 행로이며, 인생의 균형을 찾으려는 고단한 역정이자, 30대 중반의 이혼녀가 자아를 찾아 떠나는 영적 탐색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어를 공부하면서부터 어렴풋한 행복이 싹트는 걸 느꼈다. 칠흑 같은 시기를 보낸 뒤에는 행복의 희미한 가능성이라도 감지되면 어떻게든 그 행복의 발목을 움켜쥐고 그것이 날 진창에서 일으켜줄 때까지 절대 손을 놓지 말아야 하는 법이다. 이건 이기적인 행동이 아니라 의무다. 우리는 삶을 부여받았고, 이 생애에서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뭔가 아름다운 것을 찾아내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자 인간으로서의 권리)이다." (P.181)
그녀의 여행 동기를 생각할 때 마땅히 우울하고 칙칙한 여정일 것 같다고? 천만에 말씀!
그녀의 위트와 유머는 독자들의 우울과 외로움을 굴비 엮듯 줄줄이 엮어 천 년은 견딜만한 두꺼운 납상자에 담아둘 듯하다. 그리고 톡톡 튀는 생생한 표현들은 또 어떤가. 마치 글자의 자모가 뿔뿔이 흩어져 독자들의 얼굴에 물방울을 튀기며 장난이라도 걸어올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것도 지루할 즈음이면 19금의 아슬아슬한 표현들이 심장을 뛰게 한다.
"강도를 쫓듯이 시간을 쫓는다면, 시간 역시 강도처럼 교묘히 빠져나갈 것이다. 언제나 우리보다 한 발짝 앞서 가고, 이름과 머리 색깔을 바꾸고, 우리가 최신 수색 영장을 들고 로비를 가로질러 달려가면 이미 모텔 뒷문으로 빠져나가버린다. 우리를 비웃듯 아직 타고 있는 담배 한 개비만 재떨이에 남긴 채." (P.237)
이 책은 총 3부로 이탈리아에서 쾌락 추구에 관한 36개의 이야기, 인도에서의 신앙 추구에 관한 36개의 이야기, 인도네시아에서 균형 추구에 관한 36개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작가가 서문에서 밝히듯 108개의 이야기는 108개의 염주알을 상징하는 것이며, 작가는 이러한 구성을 맘에 들어 하는 듯하다.
인생의 지혜를 담아낼 때 우리는 보통 엄숙해야 한다고 여기며, 그러한 표현이나 문체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길버트는 그런 통념을 깨고, 자신의 이야기를 가감없이 솔직하게, 그러면서도 적절한 해학과 위트, 무엇보다도 그녀의 탁월한 표현력으로 자신이 깨달은 바를 잘 전달하고 있다.
"최근에 내 모습과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삶을 생각해봤다. 그건 나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려는 촌극에서 벗어난, 내가 늘 꿈꿔오던 내 모습이요, 내 삶이다. 지금 이렇게 되기까지 내가 참아왔던 모든 것들을 생각하니 이런 의문이 들었다. 그러니까 더 젊고, 더 혼란스럽고, 더 힘들었던 그 기간 동안 앞으로 나가려고 안간힘을 쓰던 나를 끌어당겨주었던 건 이 행복하고, 균형잡힌 나, 조그만 인도네시아인의 낚싯배의 갑판에서 졸고있는 내가 아니었을까?" (P.492)
빌 브라이슨의 여행기보다 재밌고, 어느 명상가의 행복론보다 뛰어난 그녀의 여행기는 그렇게 끝을 맺는다. 독자들에게 자신의 진짜 모습을 찾으라고 큰 목소리로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더할 수 없는 행복과 위안을 주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