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봄의 불확실성
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민승남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월
평점 :
예약주문


금세 익숙해지겠지만 새해는 언제나 낯설고 어색하다. 날짜를 말하거나 쓸 때에도 '2025'라는 이미 지나간 숫자가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다. 습관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어서 앞으로도 한동안 나는 '2026'이라는 숫자와 어색한 동거를 이어가야 할지도 모른다. 오고 가는 한 해가 그러하듯 계절의 변화 역시 어색하기는 마찬가지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것도 잠시 금세 여름이 오고 그렇게 끝없이 더위에 헐떡이다 보면 가을인 듯싶다가 이내 겨울이 찾아오곤 한다. 너무나 긴 여름과 미처 계절을 감각할 새도 없이 흘러가버리는 여타의 계절들. 나는 이처럼 이상한 계절의 변화가 무척이나 낯설기만 하다. 이런 감각을 구체적으로 의식하게 된 것은 과연 언제부터였을까. 그것은 아마도 코로나라는 낯선 이름이 전 세계를 점령했던 2020년 초의 코로나 팬데믹 시기부터 시작되지 않았을까 싶다. 인간으로부터 멀어지자 깨닫게 되는 사실들. 우리의 시야를 가장 흐리게 했던 것은 어쩌면 우리 곁에 늘 가까이 존재하는 인간 이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오후, 시퍼런 냉기가 뚝뚝 흐르는 한파를 뚫고 점심을 먹으러 다녀왔다. 그리고 시그리드 누네즈의 소설 <그해 봄의 불확실성>을 마저 읽었다.


"나는 어렸을 때, 나중에 크면 어린이들을 위한 책을 쓰겠노라 생각했다. 조금 더 자라서는 사랑 이야기를 쓰겠노라 생각했다. 멋지고 로맨틱한 사랑 이야기. 하지만 나중에 이제 그런 이야기는 쓸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 고전 소설들의 핵심을 이루는 결혼 이야기 말이다. 연애에서 결혼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더 이상 매력적인 줄거리가 아니었다. 이제는 마지막에 결혼에 골인한다고 해서 만사형통이 될 수는 없었다. 간음이 반드시 파멸로 이어지는 길은 아니었고, 간통이 누군가가 죽어야 한다는 의미도 아니었으며, 사랑에 빠지는 것이 자아를 해하는 열쇠도 아니었다. 문학은 그런 것들에 종지부를 찍었다."  (p.174)


소설의 화자는 맨해튼에 사는 소설가이다. 동창인 릴리의 죽음으로 인해 장례식장에서 다시 만나게 된 여러 명의 동창생들. 그리고 이어진 코로나 팬데믹. 화자는 동창 친구 바이올렛의 지인인 아이리스 부부의 부탁으로 반려 앵무새 '유레카'를 돌보게 된다. 뉴욕에서 캘리포니아로 떠났던 아이리스 부부는 팬데믹 봉쇄령으로 발이 묶이고 말았던 것이다. 더구나 앵무새를 돌보기로 했던 한 대학생은 아무런 통보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만삭의 아이리스는 캘리포아에서 떠날 수 없었고, 급하게 '유레카'를 떠맡게 된 화자. 모든 관계가 차단된 시기에 '유레카'를 돌보는 일은 화자에게도 큰 위안이 되었다.


"아무튼,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에 대해 유레카가 느낀 고마움이 아무리 커도 나보다 더할 수는 없었다. 그 기이하고 불안했던 시기의 나에겐 유레카와 함께 있을 때 시간이 제일 빨리 지나갔다. 매일 아침 기대에 부풀어 눈을 뜰 수 있었던 건, 기괴하리만큼 인적 없는 거리를 몇 블록 걸어가서 나의 보살핌을 기다리는 깃털 달린 친구를 만나는 이 단순한 허드렛일 덕이었다."  (p.104~p.105)


화자는 뉴욕에 자원봉사를 온 한 의사가 거처를 구하지 못해 난처해하자 자신의 아파트를 내어주고 자신은 유레카가 있는 아파트로 거처를 옮긴다. 그렇게 평화로운 일상이 이어지던 어느 날 돌연 사라졌던 대학생 '베치'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돌아오면서 화자와의 불편한 동거가 시작된다. 화자는 '베치'의 무책임한 행동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겼던 까닭에 그와의 마주침을 최대한 피한 채 생활하려 애쓴다. 그러던 어느 날 자전거를 탄 괴한과 마주친 화자는 그의 조롱과 위협으로 인해 외출조차 어려워지고 만다. 모든 게 순조롭지 않다고 여겼던 그 순간부터 '베치'와의 관계에 조금씩 숨통이 트인다. '베치' 역시 자신이 만든 음식을 나누고, 화자를 위해 아이스크림을 네 통이나 사오는 등 서툰 방식으로 가슴을 연다. 그렇게 두 사람은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게 되면서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기도 한다.


"두렵긴 하지만, 진실을 말하자면 난 진짜로 원하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간절히 원하는 건. 내가 실제로 가질 수 있는 것들 중에는요.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은 시간이 너무 많은 게 두려워요. 이렇게 모든 게, 모든 사람들이 엉망진창이지 않은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좋았을 것 같아요."  (p.273)


<취약함(The Vulnerables)>이라는 원제를 갖는 이 소설은 팬데믹이라는 불확실한 시기에 인간 존재의 취약함을 드러내는 동시에 취약함을 스스로 인지함으로써 우리는 새로운 시각과 가치관을 획득하게 된다는 사실을 매우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사실 인간은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몸을 도사림으로써 타인과의 깊은 관계 설정에 실패하기도 하고, 타인의 약점을 빌미 삼아 선제공격을 가함으로써 관계 맺기에 실패하기도 한다. 다정함이란 결국 나와 너의 '취약함'을 서로 애틋하게 여기는 것이다. 인간관계의 견고함은 상대방의 강인함을 인식하는 데서 오는 게 아니라 서로의 '취약함'을 가엾게 여기는 데서 비롯된다고 말할 수 있다. 방 안에 갇힌 앵무새를 함께 돌보면서 발견하게 된 모든 존재의 취약함. 어쩌면 우리는 그 낮은 곳으로부터 관계를 맺어야만 할지도 모른다.


2026년의 첫 주말이 시작되는 금요일, 나는 온몸을 꽁꽁 싸맨 채 출근을 했고, 가급적 외출을 삼간 채 하루를 보냈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적응력이란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 조금씩 기온이 오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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