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툼한 당신의 인생서에서 한쪽 모서리에 삼각형으로 접힌 몇몇 페이지를 들춰 읽으면 당신 인생의 전반을 짐작할 수 있을까요? 세세하게는 아니지만 대충이라도 말이지요. '삶은 우리가 산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억하는 것, 우리가 이야기하기 위해 기억하는 것'이라고 남미 출신의 어느 작가는 말했습니다. 나는 이따금 삶에 대한 그의 표현이 더없이 정확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때로는 불끈 저항하고픈 마음이 들곤 합니다. 우리들 각자가 쓴 인생서에서 누군가에게 말해주기 위해 접어 둔 몇몇 페이지가 겨우 우리 인생의 전부라고 말한다는 건 지나친 비약이자 우리의 삶을 비하하는 듯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어제오늘 볼이 얼얼할 정도로 추웠습니다. 나의 어릴 적 기억으로는 겨울은 언제나 이와 같은 극한의 추위가 이어졌던 것 같습니다. 고양이 세수를 한 젖은 손으로 방문을 열기 위해 문고리를 잡으면 손에 쩍쩍 달라붙는 일은 다반사, 방의 아랫목에 두툼한 솜이불을 덮고 앉아 '후' 하고 입김을 내뿜으면 공기 중으로 하얀 입김이 멀리까지 뻗어가곤 했습니다. 10월 말부터 시작된 겨울은 늦게는 4월 말에서 5월 초까지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일 테지요. 낮이 되자 기온은 조금 올라 냉랭했던 바람결이 조금 부드러워진 듯 느껴집니다. 성탄절 당일에 휴가를 나온 아들은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눈만 뜨면 밖으로만 나돌고 있습니다. 나는 시그리드 누네즈의 소설 <그해 봄의 불확실성>을 읽고 있습니다. 팬데믹 시기에 앵무새 유레카를 돌보는 화자의 일상이 조금 지루하리만치 이어지는 이 소설은 묘한 매력으로 책을 손에서 떼어내지 못하게 합니다.


"아무튼,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에 대해 유레카가 느낀 고마움이 아무리 커도 나보다 더할 수는 없었다. 그 기이하고 불안했던 시기의 나에겐 유레카와 함께 있을 때 시간이 제일 빨리 지나갔다. 매일 아침 기대에 부풀어 눈을 뜰 수 있었던 건, 기괴하리만큼 인적 없는 거리를 몇 블록 걸어가서 나의 보살핌을 기다리는 깃털 달린 친구를 만나는 이 단순한 허드렛일 덕이었다. 그건 스스로에게 <내가 왜 이걸 하고 있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고 해낼 자신이 잇는 몇 가지 안 되는 일들 가운데 하나였다."  (p.104~p.105)


시그리드 누네즈의 문체는 무심한 듯 건조한 문장을 이어가면서 때로는 독자를 무시하는 양 불친절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작가는 자신의 소설 곳곳에 독자들이 각자의 삶에서 깊이 생각해볼 거리를 툭툭 던져 놓음으로써, 우리는 지금 지루하게 책을 읽고 있는 게 아니라 마치 소설 속으로 소풍을 떠난 어린아이가 작가가 숨겨 놓은 삶의 비밀을 찾아 이곳저곳을 뒤져보는, 보물찾기 놀이를 하고 있는 듯 생각하게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한나절의 보물찾기 놀이에 심취하는 것은 물론 책을 덮은 후에도 긴 여운으로 인해 한동안 자리를  뜰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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