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 단편선 소담 클래식 6
에드거 앨런 포 지음, 임병윤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애드거 앨런 포의 남다른 재능은 소재의 선정에 있지 않을까 싶다. 작가들이 선호하지 않는 소재, 그런 까닭에 독자들에게는 낯설었던 소재를 인간 공포의 아주 작은 영역에 몰아넣음으로써 소설을 읽는 독자의 시선을 한순간에 사로잡는 능력은 그가 천재적인 이야기꾼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지만, 그 이면에는 항상 낯선 소재를 현실과 결합하고자 하는 그의 고민이 선행되지 않았을까 싶다. 낯선 소재가 공포라는 궁극적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어떤 면에서 강하고 짧은 호흡이 유리했을 터, 장편보다는 단편소설이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포는 1편의 장편과 74편의 단편을 남겼다. 단편의 대부분이 공포 소설이지만 말이다. 내각 읽었던 소담출판사에서 출간한 <포 단편선> 역시 공포 소설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검은 고양이'를 비롯하여 포의 또 다른 대표작인 '어셔가의 몰락', '적사병의 가면', '모르그가街'의 살인', '도둑맞은 편지', '함정과 시계추', '유리병에 남긴 편지' 등 우리에게도 친숙한 7편의 단편이 실려 있지만, '모르그가街'의 살인'과 '도둑맞은 편지'는 그의 저작 중 많지 않은 추리 소설로 분류된다고 하겠다.


"내 기분 따위를 이야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나는 정신이 혼미해져  비틀대다가 반대편 벽에 겨우 기대섰다. 계단을 올라가던 경찰관들도 극도의 공포와 두려움을 느꼈는지, 그 자리에 잠시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열두 개의 건장한 손이 달려들어 벽을 파내기 시작했다. 벽돌은 한꺼번에 모두 떨어져 나갔다. 이미 심하게 부패하고 머리에 핏덩이가 말라붙은 시체가 바로 눈앞에 똑바로 서 있었다."  (p.28 '검은 고양이' 중에서)


사실 우리가 읽은 공포 소설의 대부분은 어쩌면 어린 시절에 집중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소설보다 더 공포스러운 경험을 현실에서 직접적으로 체험하기 때문에 공포 소설에서 느끼는 공포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상대적으로 체감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현실에서의 경험이 많지 않았던 어린 시절, 스산한 바람이 부는 겨울밤 이불을 뒤집어쓰고 읽었던 공포 소설의 충격은 그야말로 고압 전류에 감전되는 듯한, 순수하면서도 직접적인 느낌이었던 것이다. 그 후로 한동안 멀어졌던 공포 소설을 다시 읽었던 건 '애드거 앨런 포'라는 이름에서 오는 친숙함과 그 시절에 대한 향수 때문이었다.


"무척 눈을 뜨고 싶었지만 두려웠다. 눈을 뜨면 주위가 어떤 모습일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무엇인가 끔찍한 게 보이면 어쩌나 하는 생각보다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면 더욱 무서울 것 같았다. 마침내,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눈을 번쩍 떠 보았다. 정말 두려워했던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새까만 어둠만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숨이 막혀 오는 것 같았다. 짙은 어둠이 무겁게 내리누르며 숨통을 죄는 듯했다. 공기마저도 숨을 턱턱 막았다."  (p.198~p.199 '함정과 시계추' 중에서)


공포 소설 작가로서 포의 재능은 인간이 느끼는 공포의 원인과 그 현상을 나름의 방식으로 분석하여 글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환경을 포착하고 기술한다는 데 있다. 작가는 이를 통하여 독자들에게 짧은 순간 극한의 공포를 맛보게 한다. 그리고 공포 이후의 나른한 휴지(休止). 공포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휴지(休止)의 느낌은 더욱 달콤하다. 이러한 반복을 통하여 우리는 공포 소설에 익숙해지고, 중독의 단계로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공포를 기피하면서도 심리적으로 점점 빨려 들어가는 것은 바로 이러한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포의 소설은 우리가 왜 공포 소설에 열광하는가? 하는 물음에 가장 교과서적인 답을 제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공포감이 어느 정도인지는 아마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 이상하고도 무시무시한 해역으로 접어들고 있다는 호기심에 절망적인 두려움조차 달아나 버렸고, 내가 맞이하게 될 끔찍한 죽음까지도 그러려니 하는 생각이 든다. 분명 우리는 짜릿한 흥분을 주는 무언가를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가고 있다. 그것을 알게 되는 그 순간이 곧 죽음을 의미하며 앞으로도 결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 그것을 향해서 말이다."  (p.245 '유리병에 남긴 편지' 중에서)


어린 시절 나는 공포 영화를 보거나 공포 소설을 읽은 날이면 혹여라도 꿈속에서 그와 같은 공포를 되새김질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인해 쉽게 잠들지 못했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경험할 수 있는 웬만한 일들을 다 겪어 본 나로서는 이제 공포로 인해 잠들지 못하는 날은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공포보다는 오히려 억누를 수 없는 슬픔으로 인해 잠들지 못하는 날이 더 많아졌다. 상상 속에서의 공포는 현실에서의 체험을 통해 극복되지만 슬픔은 아무리 많은 체험으로도 결코 극복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애드거 앨런 포의 단편선을 다시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어렸을 때 내가 느꼈던 순수의 공포를 이제 다시는 되살릴 수 없겠구나 하는 서글픔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