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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
로베르트 발저 지음, 안미현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7월
평점 :
로베르트 발저의 저작을 읽을 때면 언제나 아동문학가 권정생을 떠올리게 된다. 두 사람 모두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남들처럼 학업을 이어가지는 못했지만, 문학을 향한 열정만큼은 다른 어떤 이들보다 뜨거웠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로베르트 발저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타당했던 반면, 권정생에 대한 우리나라 문학계 및 국민들의 평가는 한참이나 못 미치는 듯하여 안타까운 마음이 들곤 한다. 한 사람의 재능이나 성품에 대한 평가보다 그가 가진 학벌이나 인맥을 더 중시하는 대한민국의 질긴 악습은 문학계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우리가 부유하는 어떤 감정의 색깔을 또렷이 구분하는 건 힘든 일이다. 그럼에도 로베르트 발저의 산문집 <장미>를 읽는 독자는 작가의 또렷한 사유와 거침없는 방식의 글쓰기 시도에 대해 어떤 무례함을 표하기보다 세련됨이나 자유로움을 느끼게 되는 건 왜일까. 책에 수록된 글은 대개 두세 쪽 내외의 짧은 산문이고, 뚜렷한 결말이나 극적 반전을 보여주지도 않지만, 글에서 보이는 작가의 번뜩이는 감각과 사유의 선명성은 글을 읽는 또 다른 맛을 느끼게 한다.
"나는 한때 진짜 숙녀인 한 부인을 흠모했다. 하지만 요즘은 『피가로』가 내 버릇을 나쁘게 한 만큼 그녀를 촌스럽다고 생각한다. 『마탱』이 나를 반쯤 바보스럽게 만들지 않았던가? 내 동료들이 위기의 시대인 오늘날 녹초가 되도록 글을 쓰는 동안, 나는 내가 읽는 신문들 때문에 기고만장해졌다." (p.26 '파리의 신문들' 중에서)
시를 표현하는 문학적 방식이나 기법과는 다르게 산문은 그 길이에 상관없이 작가의 개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작가들은 자신의 개성을 숨긴 채 소위 '튀지 않는 글'을 쓰려고 노력한다. 수필이 비록 붓 가는 대로 쓰는, 무형식의 글이라고는 하지만 알게 모르게 그들 세계에서 존재하는 무형식의 형식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로베르트 발저의 산문은 그와 같은 관례나 형식을 과감히 벗어던진다. 게다가 산문의 소재로 쓰인 대부분의 인물들이 지극히 서민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물들이 사실적이거나 구체적이지 않고 작가의 문학적 지식과 환상 속에서 만들어진 가공의 인물처럼 여겨진다. 그럼에도 이들은 일상의 우리들처럼 여행을 하고, 차를 마시고, 대화를 나눈다. 작가의 환상 속에서 태어난 인물인 듯하지만 현대인과 하등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작가는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설명한다.
"사무실에서 한 젊은이가 경건하고 다정하게 그리고 예의바르게 글을 쓰고 있었다. 그는 매주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고, 누이들에게 편지를 써서 자기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려주고, 이런저런 특별한 일을 적었으며, 마지막에는 항상 답장을 당부했다. 그의 부모님이 살아 계셨더라면 그에 대해 걱정하셨을 것이다. 그는 단지 생각이 너무 많아 창백해졌고, 오로지 너무 섬세한 감정 때문에 감정이 없었다." (p.66 '에리히' 중에서)
발저의 산문은 무척이나 쉽고 가볍게 읽히지만 불과 두세 쪽으로 구성된 하나의 꼭지를 다 읽은 후에도 '그래서 결론이 뭔데? 도대체 뭘 말하려고 하는 거야?' 하는 식으로 이해를 하지 못할 때가 많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문장의 구성 방식, 예컨대 두괄식이나 미괄식 혹은 병렬식이나 수미쌍괄식 등의 어떤 방식도 아닌, 산만한 문장 몇몇에 스무고개의 힌트를 숨겨 놓은 것처럼 그의 글이 펼쳐지는 까닭에 책을 다 읽은 후에도 여운이 길게 남는 것이다.
"책을 읽을 때면 나는 쉽게 몰입하고 몇 주라도 독서를 하며 보낼 수 있다. 그렇게 나는 몰리에르의 희극과 모파상의 소설을 읽었고, 이 두 위대한 작가들을 기쁜 마음으로 나란히 두었다. 그들은 기질이나 인간에 대한 통찰이 비슷했다. 모파상을 읽으면 그는 놀라운 것을 눈앞에 제시해서 인생의 일반적인 흐름을 과소평가하게 만들 수 있다. 세련된 감정에 믿을 수 없는 힘이 들어 있고, 더 위대한 단편 작가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의 작품을 읽는 것은 기분이 좋고, 놀랍고 행복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p.98 '몇몇 작가와 어느 성실한 부인에 관해' 중에서)
어찌나 비가 자주 오는지 명절 연휴가 끝난 후에도 연휴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한낮에는 모처럼 맑은 하늘이 드러나더니 저녁이 되자 금세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행복해하던 로베르트 발저도 1929년부터 발다우 정신병원에 입원하지 않았던가. 이러다가는 정말 가을도 다 가기 전에 우울한 기분에 취해 꼼짝달싹 못 할지도 모른다. 발저의 다른 산문집에 나오는 한 구절을 옮겨본다. '아침의 꿈과 저녁의 꿈, 빛과 밤, 그리고 별. 낮의 장밋빛 광선과 밤의 희미한 빛. 시와 분. 한 주와 한 해 전체. 얼마나 자주 나는 내 영혼의 은밀한 벗인 달을 올려다보았던가.'(발저의 산문집 '산책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