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 여름의 항해
앤 그리핀 지음, 허진 옮김 / 복복서가 / 2025년 7월
평점 :
과거에 벌어진 일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을 모르는 이는 아마 없지 않을까. 그러나 그것에 대한 마음속 시각이나 평가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과거에 대한 각자의 평가는 어쩌면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가 과거를 향해 내리는 평가인 동시에 그러한 미래를 향해 나아가겠다는 각자의 의지일지도 모른다. 예컨대 우리는 윤석열이라는 미치광이를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선택하는 믿지 못할 과오를 저질렀지만, 3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우리는 그러한 선택에 대한 자책과 깊은 반성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와 같은 평가는 어쩌면 우리들 각자가 아닌, 우리 앞에 펼쳐질 미래가 과거를 향해 내리는 평가인 동시에 그런 과오를 다시는 범하지 않겠다는 우리들 각자의 의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미래는 확정된 것이 아닌 까닭에 지극히 유동적이며, 그러한 미래가 과거에 대해 내리는 평가 역시 시시각각 변할 수밖에 없다.
"너무 많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내 마음을 피해 다녔지만 어쩔 수 없이 생각이 많아졌다. 그러면 핸드폰을 보면서 휴를 생각했고, 내가 용기를 내서 전화하면 어떤 대화가 이어질지 상상했다. 아니,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바로 여기 로어링 베이에서 사랑에 빠졌던 남자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나를 다른 세상으로 데려간 남자. 그는 나를 사랑했고 나 역시 그를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사랑은 변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용기를 내서 전화할 때마다 전화를 받는 사람은 항상 나에게 가라고 말한 남자였다. 지치고 망가진 남자. 하지만 그 시간을 버텨내고 시간이 흐르면 예전의 우리로 돌아갈 수 있다는 듯, 우리는 통화 시간을 늘리려고 애썼다." (p.86~p.87)
아일랜드 출신의 작가 앤 그리핀이 쓴 소설 <그 여름의 항해>를 읽는 내내 나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는 나 자신에 대해 생각했다. 젊은 나이에 고향인 로어링 베이를 떠났던 로지.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찾았던 로어링 베이에서 사랑을 찾아 연인인 로지와 함께 더블린으로 떠났던 휴. 그러나 29년이 지난 지금 두 사람은 처음 그들이 있던 자리로 되돌아갔다. 그 과정에서 그들이 겪었던 일들. 8년 전 그날, 창 너머로 딸 시어셔가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오는 모습을 지켜보던 로지는 딸의 실종과 함께 그 순간에 머물러 있다. 거짓말처럼 사라진 딸과 로지의 애틋한 모정. 딸이 여전히 살아 있다고 믿는 로지는 점점 현실적으로 변하는 남편 휴가 마냥 섭섭하게만 느껴지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들 사이의 간격도 멀어진다. 휴가 내린 마지막 결단은 로지가 자신의 고향인 로어링 베이로 돌아가 심신의 안정을 찾게 하는 것. 로지는 결국 고향으로 돌아와 허리가 아픈 아버지를 대신해 여객선 이브니스를 운행하게 된다.
"하지만 내가 시어셔와 함께 갔던 그 어두운 곳이 지금까지도 나를 괴롭힌다.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고 아무리 스스로를 달래보아도 그 생각이 내 머릿속에 숨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 그래서 가끔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내가 딸이 사라지기를 바랐었다는 생각에 눈을 꼭 감는다." (p.220)
29년 만에 다시 찾은 고향은 예전 같지 않았다. 자신의 따뜻한 안식처와도 같았던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아버지 혼자 고향 섬과 페리를 지키고 있었다. 게다가 한때는 자신의 분신처럼 여겼던 여객선 이브니스마저 낡고 병들어 있는 듯했다. 딸을 잃은 채 남편과 아들 곁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온 로지는 이브니스를 다시 바다에 띄우며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항해를 시작한다.
"부모님은 나에게 로지 드리스콜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십 년 후 나는 아빠처럼 페리 선장이 된다. 그로부터 이십구 년 후에는 완전히 망가진 상태로, 하지만 다시 배의 키를 잡겠다는 의지를 다지며 더블린에서 돌아온다. 여전히 한 사람의 아내이자 - 더블린에 있는 남편은 생각이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 어머니였지만." (p.14~p.15)
앤 그리핀의 소설 <그 여름의 항해>는 우리의 삶에서 마주치는 어쩔 수 없는 상처와 그럼에도 여전히 그 상처를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네 삶의 한계를 들여다보고, 그 치유의 과정을 조망한다. 우리는 현실에서 혹은 책을 통하여 다른 이의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하면서 그들도 역시 나와 다르지 않은 아픔과 한을 지닌, 연약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된다.
길었던 추석 연휴를 끝내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는 첫날이었던 어제는 꽤나 힘든 하루였다. 어떤 여행이든 기쁨이나 설렘은 여행이 시작되기 전의 예비적 과정일 뿐 막상 여행이 시작되면 힘든 하루하루가 이어지는 것처럼 명절이 낀 긴 연휴도 기대감으로 설레던 그 며칠만 좋을 뿐 연휴 이후의 뒤끝은 감당하기 힘든 피로감으로 녹초가 되곤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곧바로 주말 휴일이 이어진다는 것. 많은 회사들이 금요일도 쉬고 다음 주 월요일에 출근하도록 배려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하루 연차를 써서 주말까지 쉬는 이들이 많았던 것으로 안다. 그러나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는 생각에 나는 금요일 출근을 강행(?)했었다. 여전히 피로는 풀리지 않고 모처럼 맑은 가을 하늘이 께느른한 오후를 지키고 있다. 잠시 산책이라도 다녀와야겠다. 사선으로 쏟아지는 가을 햇살이 그저 좋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