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을 준비하는 동안 아파트 화단에는 어느새 소국이 피었습니다. 보란 듯이 말입니다. 초록의 물결 속에서 점점이 피어나는 하얀 소국의 대비는 마치 풍성한 생명력 너머의 깊은 우울을 암시하는 듯 이 짧은 계절을 지켜냅니다. 추석 명절이 낀 긴 연휴를 맞은 사람들의 표정에는 나른한 여유가 묻어나고, 저마다의 분주한 일정을 숨기려는 듯 짐짓 태연한 표정으로 하늘을 봅니다. 며칠 전에는 저명한 침팬지 연구자이자 세계적 동물 보호 운동가인 제인 구달 박사의 별세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구달 박사의 팬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나는 그녀의 저서를 여러 권 읽으면서 존경과 지지의 뜻을 굳혀왔던 건 사실이었습니다.


침팬지를 비롯한 여러 동물과 식물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면 알수록 인간의 잔인함이 더욱 부각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 듯합니다. 홀로코스트를 감행했던 히틀러와 나치 잔당의 잔인함은 금세기 들어 이스라엘 시오니스트의 잔인함으로 이어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가자지구에서 벌인 이스라엘의 집단학살은 홀로코스트의 잔인함을 능가하면 능가했지 결코 모자라지 않았습니다. 장 그르니에의 산문집 <일상적인 삶>을 읽고 있습니다. 여행, 산책, 포도주, 담배, 비밀, 침묵, 독서, 수면, 고독, 향수, 정오, 자정 등 12가지 주제에 대해 작가의 생각을 체계적으로 옮기고 있는 이 책은 꽤나 흥미롭습니다. 물론 작가의 또 다른 작품 <섬>에서 선보인 유려한 문체와는 크게 다르지만 말입니다.


"신앙을 간직한 채 죽은 자를 두고 흔히 <그는 주님의 품 안에 잠들었도다>라고들 말한다. 죽음이란 다른 세상으로 건너가기, 혹은 돌아가기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수면은, 설사 영원한 것이라 할지라도, 영원한 안식의 형상화이므로 거기에 결코 해로운 것은 없다. 잠자는 기독교인은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망각이 그의 목적이 아니므로 수면이 치유의 한 방법인 것은 아니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용서, 즉 죄의 사면이다. 그리고 잠은 지은 죄의 기억을 완화시킬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을 씻어내지는 못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감람산에 올라 고뇌에 찬 기도를 하는 동안은 <잠들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수면은, 예컨대 다음날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게 해준다든지 하는, 일정한 조건 하에서만 가치 있는 것이다. 혹시라도 그것이 신과의 교감을 유지하는 데 장애물로 작용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쓸모없는 것이 된다."


연휴의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우리가 그동안 유지하고 지켜왔던 삶의 규칙들이 하나둘 깨지기 시작합니다. '수면'도 다르지 않습니다. 수면 시간이나 식사 시간의 변화는 우리를 금세 지치게 합니다. 자고 먹고, 자고 먹고 하면서 다른 때보다 많은 휴식 시간을 가진 듯한데 몸은 천 근 만 근 무겁기만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체중은 예상보다 쉽게 불어납니다. 건강을 지킨다는 게 이렇게나 어렵습니다. 우리는 또 얼마나 오랫동안 빡빡한 식단과 운동 시간에 골머리를 썩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연휴 이틀째가 흐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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