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끝난 줄 알았던 장마가 뒤늦게 이어지면서 폭염과 가뭄은 한풀 꺾였습니다. 눅눅한 습기가 어두운 방안을 유령처럼 떠돌아도 밤마다 잠을 설치게 하던 열대야의 기세가 꺾인 것만으로도 그 정도의 습기쯤은 너끈히 견딜 수 있을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만나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도 전에 없이 밝아진 듯합니다. 날씨의 변화에 따라 줏대 없이 일희일비하게 될 줄을 어찌 알았을까마는 날씨가 사람들의 기분을 들었다 놨다 한 적이 요즘처럼 심했던 적은 아마 없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기온이 선선해진 탓인지 아침 운동에 나선 사람들이 제법 많아진 듯합니다. 아무리 기온이 낮아졌다고는 해도 낮보다는 새벽 시간이 운동을 하는 데는 여러 면에서 나은 까닭이겠지요. 비가 올 듯해서 우산을 챙겨 들고 산행에 나섰지만 비는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비슷한 시각에 비슷한 장소에서 거의 매일 마주치는 반가운 얼굴들도 있고, 오늘 처음 본 얼굴도 더러 있었습니다.


또래로 보이는 할머니 두 분이 곁을 스쳐갔습니다. 나는 본의 아니게 그들의 대화 몇 마디를 듣게 되었습니다. "에이, 자기 몸이 견딜 때까지 살다 가는 거지." 하고 노란 티셔츠를 입은 할머니가 말하자 곁에서 나란히 걷던 회색 티셔츠의 할머니가, "그럼! 사람이 어디 더 살고 싶다고 살아지는 건가." 하면서 노란 티셔츠 할머니의 말에 격하게 공감하는 듯 말하였습니다. 나이가 들면 다들 철학자가 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한마디 한마디의 말이 허투루 여겨지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처럼 습기가 많은 날엔 모기떼가 극성입니다. 비가 내리면 인적이 끊기고, 그리 되면 그들 역시 쫄쫄 굶어야 할 처지가 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오전에 시작된 비는 지금도 하염없이 내리고, 창밖으로 보이는 물웅덩이의 수면 위로는 빗방울이 만드는 물동그라미의 잔상이 규칙적으로 나타났다 스러지곤 합니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자신의 삶에 패배한 듯 보이지만,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하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의지를 통하여 우리는 영원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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