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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온실 수리 보고서
김금희 지음 / 창비 / 2024년 10월
평점 :
내리던 눈은 이제 비로 변하였다. 봄이나 여름과 다르게 겨울에 비를 맞고 서 있는 나무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숙연한 느낌이 들게 한다. 겨울이라고 해서 살아 있는 생명체인 나무가 물을 필요로 하지 않을 리 없겠지만 추위 속에 종일 비를 맞고 있는 모습은 처연하다 못해 숙연한 느낌마저 들게 하는 것이다. 물론 그와 같은 생각은 전적으로 나의 주관적인 느낌일 뿐 당사자인 나무는 나와 전혀 다른 느낌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돌아보면 항상 어떤 장소를 지워버림으로써 삶을 견뎌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잊어야겠다 싶은 장소들은 아예 발길을 끊어서 최대한 망각할 수 있게 노력해왔지만 이 일을 맡으면 그곳에 대해 생각하고 더 알게 될 것이었다. 거기에는 일년 남짓의 내 임시 일자리가 있었고 600년 전에 건축된 고궁이 있었고 잊지 않으면 살 수가 없겠구나 싶어 망각을 결심한 낙원하숙이 있었다." (p.17)
소설가 김금희의 전작을 모두 읽어 본 것은 아니지만 최근에 나온 신작 <대온실 수리 보고서>는 작가의 이전 작품들과 비교하여 크게 달라져 있음을 느꼈다. <경애의 마음>에 비해 작품의 스케일이나 구조가 대폭 확대된 것은 사실이지만 주제의 전달력이나 작품의 밀도는 전에 비해 떨어진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이런 결과는 곧 독자의 집중력이 흐트러지게 하고 때때로 지루함을 느끼게 하는 상황으로 이어지도록 한다. 말하자면 가독력이 떨어지는 결과를 초래한 셈이다. 자신의 작품에 있어 변화를 시도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그러한 변화를 시도하는 첫 단계는 그리 녹록지 않은 것이다.
작품은 대온실 보수공사를 맡은 바위 건축사사무소에서 문화재 공사 백서 기록담당자 채용을 위한 면접을 보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석모도에서 나고 자란 주인공 영두는 단짝 친구인 은혜의 도움으로 면접에 응하게 된 것인데, 공사 현장인 창경궁의 대온실은 영두의 아픈 기억이 서린 원서동의 낙원하숙과 가까운 곳이어서 썩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고 아빠와 단둘이 살던 영두는 아빠의 주선으로 2003년, 중학생 시절 섬을 떠나 창덕궁 담을 마주 보는 동네인 원서동으로 떠나게 된다. 당시 석모도에는 고등학교가 없었던 까닭에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진학을 하려면 섬을 떠나야만 했는데 원서동에서 낙원하숙을 하던 문자 할머니의 권유로 그보다 좀 이른 나이에 섬을 떠나게 된 것이었다. 영두는 문자 할머니의 손녀로 알려진 동갑내기 '리사'와 같은 방을 쓰면서 같은 학교를 오가게 된다. 그러나 명랑하고 순박한 성격의 영두와 매사 까칠하고 맹랑한 성격의 '리사'는 처음부터 어울리기 힘든 조합이었다.
"헤어진다는 상상만으로도 두려움이 몰려왔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나약함을 감추는 건 내 마음과 몸에 습관처럼 배어 있었다. 순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최종의 마음까지는 내보이지 않았다. 그건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방법을 몰랐던 데 가까운 것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그런 것이 너무 어려웠다. 슬프면 슬프다고, 상처가 있으면 상처가 있다고, 떠날까봐 두려우면 두렵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p.195)
영두는 결국 마음에 큰 상처를 입고 원서동을 떠났었다.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쓰게 되면서 영두는 다시는 들춰내고 싶지 않았던 낙원하숙에서의 시간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 마리코였던 문자 할머니가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겪어야만 했던 아픈 역사와도 대면한다. 그와 같은 아픔은 중2 소녀가 겪었던 지난 상처와 겹치면서 또 다른 길로 영두를 안내한다. 대대적인 수리를 거쳐 재개장을 앞둔 대온실과 이제는 모두 떠나고 집의 형체와 추억만 덩그러니 남은 낙원하숙은 그 추억을 아름답게 지키려는 사람과 어떻게든 그 모든 것을 지워버리려는 사람의 충돌로 이어진다.
"산아는 왜 옛날이야기들은 이렇게 슬프게 끝나는지 모르겠다고, 역사책 읽을 때마다 해피엔드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너무 옳은 말이라서 또다시 대답할 수가 없었다. 역사가 슬픈 건 죽은 이들 때문일 수도 있고, 늘 미완으로 남는 소망 때문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p.267)
낮에 잠깐 비로 변했던 눈은 밤이 되자 다시 찬바람과 함께 진눈깨비가 되어 내린다. 싸락싸락 소리를 내며 우산에 엉겨 붙는 진눈깨비. 어제부터 내린 눈은 117년 만의 기록적인 11월 폭설이라는데 누군가의 억울한 이야기도 이와 같지 않을까. 구름을 따라 이곳저곳 유령처럼 떠돌다가 누군가의 슬픈 추억과 함께 실타래처럼 풀려나오는 게 아닐까. <대온실 수리 보고서>는 그렇게 읽혔다. 눈이 많이 내려 '대설(大雪)주의보'가 아니라 이야기가 많이 풀려나와 '대설(大說)주의보', 오늘은 그런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