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한결 홀가분한 마음


봄날씨처럼 따사롭고 화창했던 어제는 아내 멧돼지와 함께 모처럼 진흙목욕을 했습니다. 발정기가 지난 수컷 멧돼지들에게 어쩌면 2월은 잔인한 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양지바른 언덕에 자리를 잡고 앉아 꾸벅꾸벅 조는 게 하루의 일과처럼 굳어졌습니다. 그러나 선거도 멀지 않았는데 그렇게 멀뚱히 앉아서 매일 잠만 잘 거냐는 아내 멧돼지의 성화에 못 이겨 나는 결국 마음에도 없는 전국 순회공연에 나섰던 것입니다. '돈생 토론회'라는 거창한 제목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아내 멧돼지의 명령이라면 해외 순방도 취소하는 나로서는 그깟 국내 순회공연쯤이야 하는 심정으로 호기롭게 나섰던 것입니다.


남쪽 부산에서는 새뜻이 핀 동백꽃이 나를 반겨주었습니다. 부산에서 개최하려고 했던 국제 행사의 유치에 실패한 이후 나는 부산의 멧돼지들로부터 심한 야유와 비토 정서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나는 사실 국제 행사의 유치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다만 그것을 핑계로 해외여행을 마음껏 할 수 있다는 사실과 재물이 많은 멧돼지들을 대동하고 언제든 술을 마실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행사 유치가 실패로 돌아간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로는 선거를 치를 수 없다는 똘마니들의 조언과 이러다 다 죽게 생겼다는 아내 멧돼지의 비명 때문에 나서기 싫은 발걸음을 억지로 떼어 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가는 곳마다 공약(空約)을 쏟아냈습니다. 그 많은 공약을 지키려면 나라의 곳간이 거덜 나겠지만 그게 공변될 공(公)이 아니라 단순히 빌 공(空) 자 공약(空約)이라는 걸 나의 똘마니들도 잘 알고 있는 까닭에 내가 어떤 말을 하건 크게 걱정을 하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시쳇말로 어차피 '뻥'이고 '쇼'일 뿐이니까 말입니다.


그렇게 몇 번 뻥을 치면서 다니다 보니 대전의 한 행사장에서는 나의 연설 도중에 바른말을 하는 멧돼지가 나타났습니다. 나는 그냥 둘 수가 없었지요. 마음 같아서는 날씬하게 두들겨 패서 감옥에 처넣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똘마니 멧돼지들을 시켜 강제로 쫓아냈을 뿐입니다. 보는 눈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선거를 치르기 전까지 이와 같은 쇼를 몇 번 더 진행할 요량입니다. 미련한 일반 멧돼지들은 이것이 쇼라는 사실도 모른 채 나의 공약(空約)에 열광할 것입니다.


변덕스러운 날씨입니다. 화창하고 따사롭던 날씨는 하루 만에 급변하여 소란한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국운을 예견하는 듯 말입니다. 나는 어쩌면 리더가 되어서는 결코 아니 될 무능한 멧돼지일지도 모릅니다. 이 모든 게 하늘을 찌를 듯한 아내 멧돼지의 욕심 때문에 비롯된 일이지만 돌이킬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나는 리더 멧돼지로서의 능력이 없으니 각자 알아서 생존을 도모하기를... 꽃이 피고 녹음 무성한 여름이 오면 나는 어쩌면 리더의 자리에서 쫓겨나 합당한 처벌을 받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만 된다면 지금보다 한결 홀가분한 마음일 테지요.


*경고 : 이 글은 단지 허구에 의한 소설일 뿐 특정 사실이 아님을 엄중 고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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