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없이 걸었다 - 뮌스터 걸어본다 5
허수경 지음 / 난다 / 201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더 다정한 사람이 되어야겠다 결심하는 이는 원래부터 다정한 사람이었을 확률이 높다. 우리가 지난 학창 시절을 생각해 보면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더 열심히 해야겠다 결심하는 것처럼 말이다. 언제부턴가 나는 신년계획을 세우는 일도, 다이어트나 운동 등 새해 결심을 하는 일도 모두 그만두었다. 지키지도 않을 계획을 세우느라 시간만 낭비하고 의지박약의 나 자신만 탓하는 일도 유행 지난 신파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조금 더 상냥한 사람, 조금 더 다정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 시간마다 기도와 더불어 다짐하곤 한다. 그렇다고 내가 다정한 품성을 타고 태어난 사람이라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나는 제법 까칠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걸 나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까닭에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만회해 보자는 게 나의 생각이다.


이런 거창한(?) 프로젝트를 실천하기 위한 첫 단계로 나는 시를 외우거나 읽기, 시인의 산문집이나 대담집 읽기로 계획을 잡았다. 말하자면 나는 '시인처럼 생각하기'를 실천해 볼 요량인데 그게 말처럼 쉬운 건 아니어서, 시시때때로 이해득실을 따져 좋고 나쁨을 가리는 까칠하고 몸에 밴 자본주의 성정이 수시로 튀어나오는 바람에 나 자신도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한평생 길들여진 자본주의 품성이 터줏대감처럼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까닭에 굴러온 돌인 시인의 품성은 매번 겉돌기만 할 뿐 진득하니 자리를 잡지 못하는 것이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듯 그렇게 쌓아가야 한다는 것은 허수경 시인으로부터 배운다.


"다른 이들은 잘 모르겠지만 독일어를 배운 지 10년이 넘어서야 비로소 나는 독일어로 쓰인 시들을 읽을 수 있었다. 시들을 읽을 수 있으면서부터 배낭에 시집을 넣고 수천 번도 더 걸었던 도시를 다시 걷기 시작했다. 시를 읽으며 걸었다. 시가 읽히지 않는 시대라는데 시 중독자이자 시인인 나는 시를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시를 통하지 않고는 사람의 속내나 거리조차 가늠하기 힘들었다. 시는 나와 세계를 이어주는 미디엄이었다. 내 영혼의 속살은 그 매개로만 표현되었다. 이방의 시인들을 읽으면서 나는 이 도시를 드문드문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p.24)


시인 허수경이 독일로 이주하여 터를 잡고 살았던 도시 뮌스터. 난다의 걸어본다 시리즈 중 다섯 번째 이야기인 <너 없이 걸었다>는 시인 자신이 살고 있는 뮌스터의 사람들과 풍경을 독일 시인들의 시와 엮어 그곳에 살고는 있지만 원주민의 시각이 아닌, 그렇다고 완전한 이방인의 시각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경계인의 시각으로 풀어내고 있다. 그럼에도 시인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독일 문화의 깊은 숨결을 호흡하고 있다.


"외국어를 쓰고 사는 동안 나는 우리말로 대화할 사람들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실컷 우리말로 수다를 해보았으면!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나에게 절실한 건 우리말로 대화를 나눌 어떤 사람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특정한 사람들이었다. 그 특정한 사람들이 들어 있는 기억의 서랍은 하도 자주 열어보아 모서리가 둥글게 닳아 있다. 이 거리에서 내가 그렇게 자주 오라고 불러대던 사람들은 아마 다른 거리에서 나를 오라고, 그렇게 자주 불러대고 있는지도 모른다."  (p.114)


허수경 시인이 우리에게 소개하는 독일 시인은 하이네, 트라클, 벤, 작스, 괴테, 릴케 등 어디선가 한두 번쯤 들어보았음직한 유명 시인들과 그베르다, 아이징어, 호프만슈탈, 드로스테휠스호프 등 낯선 시인들의 이름이 섞여 있다. 진주라는 소도시에서 태어난 한 시인이 시가 아닌 고고학을 공부하기 위해 뮌스터라는 독일의 소도시로 떠났을 때, 시인을 아는 한국의 많은 사람들은 머잖아 돌아올 거라고 아주 쉽게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을 깨고 시인은 독일에 눌러앉았고, 익숙했던 공간을 떠난 한 인간의 삶과 고독이 문틀에 새긴 아이의 키 눈금처럼 시와 글로 표출되고 있다. 독일이라는 먼 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시인의 해박한 지식과 깊은 사유를 버무린 이 책은 한 권의 문화백과사전인 셈이다.


"나이가 든다고 유혹이라는 치명적인 달콤함을 버릴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뭔가, 혹은 누군가에게 끌렸던 그 설렘만큼 삶을 삶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없다. 죽음의 기미를 알아채면서도 유혹에게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이들은 일종의 삶 중독자이다. 파멸을 예감하면서도 매일밤 도박장을 찾는 이 어쩔 수 없음을 살아내야 하는 이들. 그리고 우리들 모두에게는 유혹이 인생을 동반한다."  (P.187)


터무니없는 겨울 햇살이 비듬처럼 쏟아지는 오후. 나는 베란다 유리문을 통해 산책을 나온 사람들의 느린 발걸음을 시선으로만 좇고 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소리가 차단된 채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 풍경은 평화 그 자체가 아닌가. 그러나 선량한 그들도 살다 보면 때론 본의 아니게 악다구니를 쓰기도 하고,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릴 때도 있을 터, 나는 조금 더 다정한 사람이 되기로 했던 오래전 약속을 부서지는 햇살 속에서 조심조심 꺼내 본다. 끈적하게 눌어붙은 주머니 속 사탕껍질을 벗기듯.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