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주말은 몇 개입니까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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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분. 얼굴에 닿는 바람결에는 한여름의 더위가 쏙 빠진 채였다. 계절이 주는 들뜸과 가벼운 충동으로 인해 삶의 무게는 조금 가벼워진 느낌이다. 바삭바삭 부서질 듯한 삶의 건조함을 달래는 데에는 사실 독서 만한 게 없는데 가을이 건네는 경쾌한 유혹은 물리치기 힘들다. 하여 독서의 계절 가을은 매년 말로만 그칠 뿐 진득하니 앉아 책을 읽는다는 건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한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기억하는 가을은 하나의 온전한 계절이라기보다 차창 밖으로 스치듯 지나쳤던 상상 속의 계절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이따금 하게 된다. 하나의 계절로 기억하기에는 너무나 짧았고, 온전한 계절을 만끽하기에는 우리의 여유가 너무나 부족했기에...


에쿠니 가오리의 에세이 <당신의 주말은 몇 개입니까>를 읽었다. 가을을 닮은 듯 얇고 가벼운 에세이집이다.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은 몇 권 읽은 기억이 있지만 에세이는 처음이지 싶다. 에쿠니 가오리의 문체는 가볍고 경쾌하다. 그래서인지 이 계절과 닮아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직장인인 남편과 프리랜서 작가인 에쿠니 가오리의 생활을 있는 그대로 담백하게 담아낸 이 책은 세상 어떤 곳에서도 있음 직한 한 가정의 모습을 에쿠니 가오리의 경쾌한 문체로 포착하고 있다. 책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그런 이야기들이 작가의 밉지 않은 말투로 우리에게 전해지는 셈이다.


"결혼하고 두세 달 지나면 결혼 생활에서 밥이 얼마나 큰 관건인지 싫어도 깨닫게 된다. 회사에서 돌아오면 밥을 먹고 자는 그 일련의 행동에 군더더기 하나 없는 남편의 모습을 보다 보면 마음속에서 예의 진부한 의문 - 이 사람, 혹시 밥 때문에 나랑 결혼한 거 아니야 - 을 떨어내기가 어렵다."  (p.48)


우리는 사실 달달한 연애 감정을 더 길게 지속하고 싶어서 결혼을 결심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한낱 허튼 꿈에 지나지 않을 뿐, 우리는 결혼과 동시에 '생활'이라는 현실의 높은 벽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연애 과정에서는 보지 못했던 상대방의 습관과 장단점들을 목격하면서 발견의 기쁨보다는 오히려 살아갈 날들에 대한 아득한 절망과 좌절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도 잠시, 어떻게든 새로운 환경에 맞춰 조화롭게 살아가야 한다는 게 내가 풀어야 할 결혼 생활의 가장 큰 숙제임을 깨다는 순간 새로운 전투력이 샘솟는 것이다.


"해마다 그만 갈게,라고 말하고 부모님과 여동생의 배웅을 받으며 콜택시에 올라탈 때면 나는 정말 절망적인 기분이 든다. 대체 왜 난 여기서 나가려는 것이지, 하고 생각한다. 결혼식 날 아침하고 똑같다. 하지만 택시가 아파트에 가까워지면, 돌아가고 싶어한 내 마음에 안도한다. 아아 아직은 괜찮다. 남편을 보고 싶어하니 다행이다. 집에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할 수 있어 정말 다행이다."  (p.89)


'결혼한 지 2년이 되어 가는 가을에서 3년이 되어 가는 가을까지 쓴 에세이를 모았다'는 이 책은 마치 몇십 년 결혼 생활을 이어 온 베테랑 주부의 이야기인 듯 지극히 평범하기도 하고, 어제 막 결혼을 한 새색시의 이야기인 듯 유난히 설레기도 한다. 결혼 생활이란 어쩌면 그와 같은 극과 극의 기복을 넘나드는 기적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유명 작가의 결혼 생활이라고 해서 우리와 크게 다를 게 없다. 삶이라는 고단한 여정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는 사이. 나를 이해하는 가장 친밀한 이웃이자 동료인 그들이 다만 남편과 아내라는 이름으로 불릴 뿐이다.


"지금까지는 남편과 같이 있다. 그것이 전부다. 그리고 같이 있는 동안은 함께하는 생활을 마음껏 맛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헤어질 때가 오면 조금은 울지도 모르겠지만.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한다면, 아마 더 울지도 모르겠다."  (p.151)


추석 전의 분주한 주말 오후. 사람들은 저마다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나는 회사에 출근하여 한껏 여유를 부리고 있다. 나이가 들수록 인간에 대한 혐오만 쌓이는 까닭은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이해와 한계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에쿠니 가오리의 에세이 <당신의 주말은 몇 개입니까>를 이렇게 쉽게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볼에 닿는 바람이 좋았고, 높아만 가는 하늘이 좋았고, 그 속에 머무는 나 스스로가 좋았던 까닭이다. 오늘은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는 춘분, 소슬한 바람이 불고 저녁 어스름이 내리는 공원 벤치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일은 얼마나 즐거운가. 나는 벌써부터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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