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꽃길만 걷게 해줄게.


이맘때의 등산로는 하얀 꽃길이다. '권불십년(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던가. 짙은 향기를 내뿜으며 오가는 등산객들의 마음을 한껏 들뜨게 했던 아카시아꽃의 흰 꽃잎들도 가는 봄을 아쉬워하며 분분히 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봄의 등산로는 딱 두 번 꽃길이 된다. 봄의 상징처럼 화려하게 피었던 벚꽃이 단 한 번의 봄비에 처연히 지고 마는 4월의 어느 시기와 요즘과 같이 아카시아꽃이 지는 시기가 바로 그것이다. 나는 흰 카펫처럼 점점이 흩뿌려진 꽃길을 어슬렁거리며 걸을 때마다 괜스레 미안해지곤 한다. 리더 멧돼지로 취임한 지 만 1년이 지났건만 이렇다 할 성과는커녕 다수의 서민 멧돼지들로부터 욕만 무수히 듣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나를 열렬히 지지하는 늙다리 멧돼지들로부터 "속이 다 후련하다."는 격려의 말을 듣고 있으니 그나마 위안이라면 위안이라고 하겠다. 죄인과 다름없는 내가 이런 꽃길을 걸을 자격이나 있을까마는 언젠가 감옥에 갈 미래라면 지금의 호사를 맘껏 누리는 것도 삶을 즐기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겠다는 게 지금의 생각이다. 뉘라서 이런 호사를 구분 없이 베풀어준다는 말인가.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나는 결혼 전 아내 멧돼지에게 꽃길만 걷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었다. 돈과 권력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아내 멧돼지의 욕심과 강한 집착이 매력적으로 보였던 까닭에 나는 이런저런 수컷 멧돼지와 사귀었던 아내 멧돼지의 허물을 못 본 척 덮어둘 수 있었다. 물론 뒷골목 시절 나의 행실도 건전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말이다. 술에 취한 채 시중을 들던 여러 암컷 멧돼지들을 맘껏 유린하곤 했으니 아내 멧돼지나 나나 도긴개긴, 그 밥에 그 나물이긴 하다. 아무튼 아내 멧돼지에게 눈이 멀었던 나는 어떤 순간에도 제발 나를 버리지 마라 달라며 매달렸었다. 나를 버리지 않는 대신 나는 아내 멧돼지로 하여금 꽃길만 걷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었다. 결혼 후 아내 멧돼지는 나의 권력을 이용하여 이런저런 이권에 개입했고, 나는 그때마다 나의 뒷골목 똘마니들을 압박해 수사를 막아주곤 하였다. 그럼에도 리더 멧돼지로 취임한 지금도 아내 멧돼지의 범죄 사실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나는 얼마 전 날리면 멧돼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도 아내 멧돼지에게 다짐하였다. 내가 있는 한 무슨 일이 있어도 감옥에 가는 일은 없을 거라며 앞으로도 영원히 꽃길만 걷게 해 주겠노라고.


며칠 전 기시감 멧돼지의 방문이 있었다. 방사능 오염수를 바다에 버리고 싶어 하는 일본의 속셈을 내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리더 멧돼지로서 나의 무능력과 아내 멧돼지의 범죄 전력 등을 무마할 수 없는 나로서는 기시감 멧돼지의 요청을 들어주는 대신 나보다 힘이 센 날리면, 기시감 멧돼지를 확실하게 나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물론 방사능 오염수를 바다에 뿌리는 순간 수산업에 종사하는 우리나라의 많은 멧돼지들이 모두 직업을 잃게 되겠지만 말이다. 게다가 삼중수소에 오염된 여러 수산물을 먹은 수많은 멧돼지들이 대를 이어 그 피해를 감당하게 될 테고... 그러나 나의 신념은 여전히 확고하다. 나라가 망하고 이 땅에 사는 많은 멧돼지들이 죽거나 병이 들어 고통을 받는다 해도 아내 멧돼지의 앞길이 꽃길이라면 그 무엇을 두려워하랴.


*경고 : 이 글은 단지 허구에 의한 소설일 뿐 특정 사실이 아님을 엄중 고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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