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잎 한 장처럼 - 오늘을 살아가는 당신을 위한 이해인 수녀의 시 편지
이해인 지음, 오리여인 그림 / 샘터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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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좋아하던 시절이 있었다. 누군들 한 번쯤 자신의 인생에서 그런 낭만적인 시절이 없을까만은 내가 유독 그렇게 말하는 까닭은 남들보다 조금 특별한 방식으로 시를 사랑하고 아꼈기 때문이다. 없는 형편임에도 다달이 시집을 사들이는 것은 물론 좋아하는 시인의 시를 밤새워 외우기도 하고, 번잡한 일상에서 낙서처럼 시를 써보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속절없는 시의 매력에 빠져들어 헤어나질 못했다. 그러는 사이 한여름의 오후처럼 한없이 무료했던 시간들이 빠르게 흘러갔고, 현실에 쌓인 산적한 일들을 보며 자책과 후회만 가득 안은 채 시의 밝음으로부터 차츰 멀어져 갔다.

 

내 삶의 끝은/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이루어질까/밤새 생각하다

잠이 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니/또 한 번 내가

살아 있는 세상!

 

 

아침이 열어준 문을 열고/사랑할 준비를 한다

죽음보다 강한/사랑의 승리자가 되어

다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용기를 구하면서

지혜를 청하면서/나는 크게 웃어본다

밝게 노래하는 새처럼/가벼워진다

 

-이해인의 시 <어느 날의 단상 1>

 

 

이해인 수녀님의 시집 <꽃잎 한 장처럼>을 기꺼운 마음으로 읽었다. 소설이나 에세이를 읽듯 읽는다면 퇴근 후 하룻밤이면 족한 분량이지만 나는 꼭꼭 곱씹듯 한 글자 한 글자 눌러가며 읽었다. 그렇게 느려진 시간의 갈피마다 시를 사랑했던 옛 시절의 추억들이 조롱조롱 되살아났다. 자신의 삶을 가감 없이 기록해 온 수녀님의 시는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얼마나 많은 향수와 그리움을 더하는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오늘 이 시간 속의

하느님과 이웃이/자연과 사물이

내게 말을 걸어오네

 

 

시로 수필로/소설로 동화로

빛나는 새 얼굴의/첫 페이지를 열며

읽어달라 재촉하네

-이해인의 시 <오늘의 행복> 중에서

 

첫 서원을 한 지 54년이자 희수라고 칭하는 만 77세를 맞았다는 수녀님은 우리가 읽는 수녀님의 시에서 만큼은 여전히 젊고 파릇파릇하다. 그러므로 시인인 수녀님의 계절은 언제나 봄이다. 이제 막 꽃을 피운 행복의 언어들이 화려하게 수놓아지고 연녹색 희망의 언어들이 시의 구석구석을 채운다.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 삶의 기쁨을 노래하기도 하고, 팬데믹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사랑과 우정을 통해 이전과 다름없는 관계를 지켜주는 소중한 이들에 대한 고마움을 상기시켜주기도 한다. 이해인 수녀님이 일상생활을 기록하고 있는 일기 노트 가운데 2021년에 적었던 글들을 골라 실었다는 4부의 글들을 읽고 있노라면 수녀님의 투명한 마음결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듯하다.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우리 그냥

오래오래/ 고맙다는 말만 하고 살자

이 말 속에 들어 있는/ 사랑과 우정/ 평화와 기도를

시들지 않는/ 꽃으로 만들자

죽어서도 지지 않는/ 별로 뜨게 하자

사랑하는 친구야

- 이해인의 시 〈고맙다는 말〉 중에서

 

소설가 이외수 씨의 별세 소식을 들었던 오늘, 내가 좋아했던 작가들이 한 분 두 분 세상을 뜨는구나, 하는 생각에 흐린 하늘을 보며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한 세대를 살아낸다는 게 이렇듯 고되고 질긴 것임을 나는 봄비에 지는 꽃잎을 보며 깨닫는다. 시나브로 잊히는 이름들. 천상병 시인, 소설가 박경리, 법정 스님, 소설가 박완서, 소설가 이외수... 나는 그들로 인해 삶의 덧없음을 조금씩 지울 수 있었고, 봄꽃처럼 환한 미래를 꿈꿀 수 있었다. 벚꽃이 지는 계절에 이해인 수녀님의 <꽃잎 한 장처럼>을 희망처럼 꾹꾹 눌러가며 읽는 나는 왠지 모를 설움에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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