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 그 여자의 부엌 - 부엌에서 마주한 사랑과 이별
오다이라 가즈에 지음, 김단비 옮김 / 앨리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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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이란 소재의 적합성이 아니라 작가 개인의 역량에 달려 있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오다이라 가즈에가 쓴 <그 남자, 그 여자의 부엌>을 읽으면서 특별하지도 않은 그 사실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작가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부엌을 소재로 인생의 희로애락과 삶의 의미를 자연스레 끄집어내고 있었다. 부엌에 대한 취재라고 한다면 우리는 으레 독특한 취향의 부엌 인테리어나 남들은 모르는 요리 비법 몇 가지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나도 그랬다. 부엌이라는 공간에서 드러나는 안주인의 취향과 부엌을 배경으로 찍은 행복한 가족사진이 다이겠거니 생각했는데 나의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책의 분위기는 군더더기 없이 매끈하고 자연스러웠다. 어느 것 하나 도드라지지 않고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서 작가는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자했을 터였다. 어쩌면 삶의 곁다리가 될 수도 있는 부엌 인테리어와 요리 비법에 집중하지 않고 부엌이라는 공간에 묻은 시간의 흔적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꼭 닮은 부엌의 형태와 기능에 집중함으로써 집주인의 삶과 인생관을 알 수 있도록 한다.

 

"잡지에 실리는 근사한 부엌에서는 웃음과 단란함과 맛있는 음식이 그려진다. 그러나 살다보면 맛있는 음식을 만들 기분이나 몸 상태가 아닐 때도 있다. 그곳에는 뜻대로 되지 않는 사정과 이야기가 있다. 내가 보아온 바로는 어떤 부엌에나 아주 약간의 애절함과 애달픔이 섞여 있다. 생활이란 그런 것이다." (p.7)

 

2013년 1월부터 지금까지 매주 '아사히신문' 웹진 '&w'에 도쿄에서 생활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부엌을 찾아가 생활감 가득한 풍경과 일상의 이야기를 연재해오고 있다는 작가는 <그 남자, 그 여자의 부엌>에서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을 내세우고 있다. 55세의 1인 가구 여성을 비롯하여 21세의 아들과 함께 사는 46세의 여성 회사원, 63세의 아내와 함께 사는 73세의 남편, 물담배가게를 운영하는 38세의 독신 남성, 13세의 딸과 49세의 프리랜스 여성 편집자,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생활하고 있는 92세의 할머니 등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연령도, 직업도, 심지어 성적 취향도 제각각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자신뿐만 아니라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을 끔찍이 사랑한다는 점이다.

 

"그날그날의 작은 일상을 야무지게 살아간다. 밥을 안치고, 국물을 내고, 된장국을 끓인다. 병원에 가서 특별한 치료를 받거나, 돈을 들여 답답한 마음을 풀러 여행을 가거나, 어려운 책을 읽지 않아도,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마음을 회복할 수 있다. 부엌에 서면서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과 마주하고 잃어버린 시간과 대치했다. 그리고 지나간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시간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엌은 그녀에게 상처 입은 마음을 고치는 치료실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p89)

 

자신의 삶의 형태가 세월에 따라 변해가는 것처럼 가족의 삶을 지탱하는 부엌도 그 구성원의 변화를 고스란히 반영하게 마련이다. 남편과 이혼한 후 장성한 아들과 함께 살면서 크게 바뀌었을 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을 가족으로 맞아들이면서 달라졌을 수도 있고, 세상을 떠난 남편을 기리며 부엌 한켠에 전에는 없던 남편의 불단을 마련할 수도 있다. 작가의 눈에는 그 모든 것들이 삶을 구성하는 더없이 소중한 변화들로 비친다.

 

"나는 그 바지런한 모습에서 긍지와 자부심 같은 것을 느꼈다. 그것은 말로는 표현하기 어렵다. 세 자녀를 길러내고, 다섯 식구를 부엌에서 보살펴온 어머니만이 갖는 자신감. 자녀들은 저마다 독립하고, 다시 둘이 된 부부가 함께 느끼는 평화로운 성취감. 그렇게 말하면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요, 하며 웃을 게 뻔하다. 하지만 이 다이닝 키친에는 내가 알고 싶은 인생의 힌트가 잔뜩 숨어 있다. 본인들이 눈치채지 못할 뿐이다. 대개 행복이라는 것은 그 한복판에서는 실감하기 어렵고, 지나고 나서야 그것이 행복이었음을 깨닫는 법이니까." (p.52)

 

책에 소개된 열아홉 곳의 부엌은 저마다의 비밀을 간직한 채 어떤 식으로든 삶을 유지하도록 하는 생명의 원동력인 동시에 가장 상처 받기 쉬운 내밀한 속살과도 같다. 작가는 그들의 속마음을 듣기 위해 해가 바뀌는 동안 몇 번이나 같은 집에 드나들었고 그러는 사이에 가족 구성원이 달라지기도 하고 삶의 애환이 부엌 곳곳에 스며들기도 했다. 그러나 삶이 계속되는 한 또다시 부엌에 서서 한 끼의 식사를 만들어야 한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삶은 이처럼 끝도 없이 반복되는 지루한 연속일지도 모른다.

 

"거리를 걷다 뜻밖에 그 옛날 연인과 나란히 앉았던 카페나 약속 장소였던 서점 앞을 맞닥뜨려 가슴을 꽉 조여올 때가 있다. 끝났다고 믿었던 사랑의 상처가 미세하게 벌어져버리는 탓이다. 사람들의 부엌에도 닮은 구석이 있다. 연인의 잔향을 말끔히 지웠다고 생각했는데, 쓰다 만 발사믹 식초나 도시락통, 위스키병 하나에 문득 잊었던 쓰라림이 되살아난다." (p.263)

 

정말 그렇다. 사랑하던 사람이 떠나고 동그마니 홀로 남겨진 부엌은 왠지 모르게 쓸쓸하다. 과거의 기억들이 사용하던 수저에, 밥그릇에, 물컵에 지문처럼 남아 있다가 문득문득 사람들의 가슴을 한바탕 헤집어놓곤 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앞으로 나아갈 결심을 할 수 있는 건 우리 곁에는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과거와 현재가, 또는 미래가 서먹서먹한 얼굴로 조우하는 곳, 부엌은 그런 곳이다. 누군가 곁에 없어도 차 한 잔을 앞에 놓고 자신과 스스럼없이 대화할 수 있는 곳. 그러므로 부엌은 마법의 공간이자 위로의 공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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