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T - 내가 사랑한 티셔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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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에서 눈치챘겠지만 이 책은 저자인 하루키가 이런저런 이유로 소장하게 된 수백 장의 티셔츠를 소재로 가볍게 쓴 에세이다. 수집가도 아닌 자신이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주변에 물건이 쌓여 있더라며, 티셔츠를 갖게 된 배경도 다양하여 마라톤 완주 기념으로, 홍보용 목적으로, 혹은 여행지에서 갈아입을 옷으로, 혹은 값싸고 재미있는 티셔츠가 눈에 띄어 사거나 전달받은 것으로 티셔츠만 넣은 상자가 이미 넘칠 지경이 되었다는 게 그의 설명. 사연도 제각각인 수백 장의 컬렉션으로 에세이를 쓰기로 했단다.

 

"딱히 비싼 티셔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예술성이 어"쩌고 할 것도 없다. 그냥 내가 마음에 들어 하는 낡은 티셔츠를 펼쳐놓은 뒤 사진을 찍고 거기에 관해 짧은 글을 쓴 것뿐이어서, 이런 책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우리가 직면한 작금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일조가 될 것 같지도 않고)."  (p.8 '책머리에' 중에서)

 

작가는 다양한 기준으로 분류한 티셔츠의 사진을 찍고 글을 쓰면서 자신이 살아온 지난 삶과 방문했던 여행지, 그의 삶에서 윤활유처럼 작용했던 여러 취미와 그동안 만났던 사람들과의 인연 등을 반추하며 티셔츠 하나하나에 얽힌 사연들이 오히려 고마웠을지도 모른다. 삶을 회고할 수 있다는 건 여전히 그에 덧붙일 수 있는 여분의 삶이 존재한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추억은 언제나 낡은 티셔츠처럼 친근한 것일지도 모른다.

 

"1988년에는 또 무라카미 철인3종 경기에도 출장했습니다. 건강했지요. 이 티셔츠를 외국에서 입고 있으면 "무라카미 씨, 철인3종 경기도 주최했어요?" 하는 질문을 받기도 하는데, 당연히 그런 일은 없습니다. 니가타 현 무라카미 시에서 철인3종 경기 대회를 개최하고 있어서 나는 그저 참가만 했을 뿐. 인척 관계 같은 건 없다. 나는 이 대회를 좋아해서 지금까지 다섯 번인가 여섯 번은 나간 것 같다."  (p.90)

 

현지에서는 시티보이 잡지를 표방하는 <뽀빠이>에 일 년 반 동안 연재되며 화제를 모있던 에세이를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는 <무라카미 T>는 재즈, 야구, 위스키, 레코드 등 그의 삶을 대표하는 주제어들을 그대로 열거하며 각각의 주제에 맞는 티셔츠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게다가 여름에는 오로지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으로 거리를 누빈다는 작가의 오래된 습관에서 읽히는 것처럼 작열하는 태양과 티셔츠는 어쩐지 묘한 어울림으로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을 것 같다.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은 채 느긋하고 자유로운 여름 한낮을 보내기에는 티셔츠가 딱인 것처럼 <무라카미 T>를 책의 목차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읽어보는 건 어떨까.

 

"아일랜드를 돌고 나서 다른 도시에 갈 때마다 펍에 들어가 기네스를 마신다. 그러면 도시마다 가게마다 맥주 온도나 거품이 생긴 정도 등 조금씩 맛이 다르다. 그게 재미있어서 여러 도시에서 기네스를 주문해서 마셨다‥‥‥라고 쓰고 보니 기네스가 너무 마시고 싶어지네요. 마침 근처에 아일랜드 펍이 있는데 그 가게의 멀리건 스튜가 굉장히‥‥‥. 아니, 그 전에 이 원고를 다 써야지."  (p.155)

 

딱히 교훈이 되거나 감동을 선사하는 글들은 아니지만, 오늘처럼 초여름 햇살이 내리쬐는 한낮에 머리를 식히며 느긋한 마음으로 읽기에는 더없이 좋은 책이다(이것도 물론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그나저나 나도 목이 늘어난 오래된 티셔츠를 수선을 하거나 버리거나 해야 할 텐데... 정해진 일정이 없는 오늘과 같은 날에는 왠지 모를 게으름이 저 밑바닥으로부터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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