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어느 시점이 되면 삶은 비교적 단출해지고,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하는 게 비교적 쉬워진다. 그렇다고 어떤 일이건 시작도 하기 전에 무작정 포기해버리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그렇게 자신을 기준으로 모든 걸 판단함으로써 점점 약해지는 체력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게 그닥 힘들어지지 않는 건 사실이지만 나쁜 점도 있다. 자신을 기준으로 내린 판단을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하려고 든다는 점이다. '꼰대'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으면서도...
'나이가 들수록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는 말을 실천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고 있다. 눈에 띄게 말수가 줄었다며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게 아니냐고 걱정스럽게 물어오는 동료들도 있다. 그럴라치면 '걱정은 무슨 걱정, 그냥 체력을 아끼기 위해 말을 삼가고 있을 뿐이야. 젊은 시절에는 몰랐었는데 말을 하는 것도 이게 에너지를 여간 많이 잡아먹는 게 아니더군.' 하면서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너스레를 떨곤 한다.
은유 작가의 산문집 <올드걸의 시집>을 읽고 있다. 나는 작가를 <글쓰기의 최전선>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고, '은유? 못 들어 본 작가인데'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작가의 이름을 기억하게 되었다. 자신의 경험담에 시 한 수를 더하여 한 꼭지의 글을 형성하는 이 산문집은 나이가 들수록 메말라가는 감성을 어떻게든 되살리려는 작가의 애틋한 노력이 묻어나는 까닭에 때로는 나도 모르게 울컥 목이 메기도 한다.
"사는 일은 가끔 외롭고 자주 괴롭고 문득 그립다. 바늘 하나로도 없어질 수 있는 것이 생명이고 눈송이 하나로도 깨어날 수 있는 것이 사람 아닌가. 그러니 이 헛됨을 '누리면서 견딜' 수 있는 한 번의 기쁨, 한 번의 감촉, 한 번의 이윽한 진실이 필요하다. 합정동에 두고 온 민들레처럼. 학림다방에 두고 온 종이학. 팔뚝에 저장된 체온 같은 것들……. 나의 무제한적인 부副, 눈과 함께 서리서리 쌓인 시간의 기억들. 그것으로 겨울을 나고 일생을 버틴다. 사람은 가도 옛날은 남으니까"
장마철의 먹먹한 하늘에선 이따금 눈물처럼 비가 내리고, 흐려진 시간 사이로 오래된 기억들이 배시시 웃고 있는 오후. 휴일 오후의 삶은 누리는 것도, 견디는 것도 아닌 담담히 지켜보는 것으로 마감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