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 - 내 인생의 셀프 심리학
캐럴 피어슨 지음, 류시화 옮김 / 연금술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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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기의 나이도 아닌데 하릴없이 하루하루 지구에 무게만 더해간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나이가 들수록 삶은 더욱 단출해지고, 욕심으로부터 점점 멀어져야 하건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작년에 비해 몸무게가 족히 3, 4 킬로그램은 늘어난 듯한, 두둑한 살집 때문에 행동마저 둔해진 듯한 느낌을 받을 때마다 스멀스멀 부끄러움이 솟아오르곤 한다. 욕심은 끝이 없어서 없던 식탐도 만들어내는가 보다.

 

계절이 바뀌고 말로만 듣던 불볕더위를 직접 몸으로 겪게 되면서 한편으로는 내심 '잘 됐다. 땀을 흘리면 살도 좀 빠지지 않을까?' 은근한 기대감도 높아지는 게 사실이지만 어디 그게 생각대로 되는가 말이지. 아침마다 산을 오르고 한낮 더위에 노출되는 시간도 일부러 길게 가져보지만 작년보다 딱 1년만큼 더 나이가 들었다는 당연한 사실만 확인할 뿐 세월을 거슬러 체력이 더 좋아졌다거나 비슷하게 유지하고 있다는 느낌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게 현실. 우리는 세월을 기억으로 대체하면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자신의 생명력을 세월과 맞바꾸고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는 일들은 우리 자신이 삶에 대해 어떤 상상을 하고 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우리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고, 많은 부분 그 이야기대로 살아간다. 삶이 어떤 모습인가는 의식적으로, 혹은 더 많게는 무의식적으로 우리 자신이 선택한 대본에 달려 있다." (p.16)

 

융 학파의 심리학자 캐럴 피어슨이 쓴 <나는 나(The Hero Within)>를 읽게 된 것도 세월에 따른 나 자신의 변화를 감지한 데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스스로에게 답답함을 느끼면서도 자신의 운명에 고립된 듯, 변화에 대한 열망은 마음속에 늘 있지만 정해진 운명에 갇혀버린 듯 살아가게 되는 근본 원인이 과연 무엇인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인간은 각자 자신이 의미를 부여한 세계에서 살고 있는데, 이는 자신의 내면을 어떤 원형(archetype)이 지배하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칼 융의 원형 심리학을 바탕으로 인간의 마음속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심리 원형을 고아, 방랑자, 전사, 이타주의자, 순수주의자, 마법사 등 여섯 가지로 분류하고, 이 여섯 가지 원형이 한 사람의 내면에서 평생 동안 어떻게 형성되고 어떤 모습으로 성장하고 지배하는가를 설명함으로써 여섯 가지 원형이 개인의 삶과 자아 형성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독자들에게 각인시킨다.

 

"삶에서 자주 무력감을 느끼고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다면, 이 고아 단계를 통과하도록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 누구도 홀로 고통을 겪어서는 안 된다. 우리 모두는 상처 입은 사람들이며 누구나 불완전한 존재이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 안의 고아가 주는 선물이다. 따라서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 단순히 위안과 지지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저마다 커다란 퍼즐의 한 조각이며 누구도 모든 해답을 갖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p.53)

 

고아 원형은 사람을 믿지 않고, 자신을 희생자로 보며, 삶에 대해 별로 기대하지 않는 심리적 추방자이고, 방랑자 원형은 삶이 어딘가에 갇혀있는 것처럼 느끼고 이상적인 곳을 찾아 떠나는 유형이며, 전사 원형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싸우는 유형으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자신을 몰아붙이는가 하면 상황을 바꿀 수 있다는 확신과 개인적 책임감으로 넘쳐난다. 이타주의자 원형은 자신보다 숭고한 무엇인가를 위해 혹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는 자세를 지니게 되며, 순수주의자 원형은 삶을 낙관하고 보다 큰 선에 대한 믿음을 가진 유형으로 자신이 희생자라는 피해 의식에서 벗어난 사람이다. 마법사 원형은 자신의 미래를 마법사처럼 변화시키려는 강한 의지를 지닌 사람으로 자신을 세상의 중심에 놓고 삶의 주인을 자신으로 설정하는 유형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가 삶에서 방향을 잃을 때마다 각자의 내면에 있는 고아는 회복력을, 방랑자는 독립심을, 전사는 용기를, 이타주의자는 연민을, 순수주의자는 삶에 대한 믿음을, 마법사는 변화를 이끌어내도록 돕는다.

 

"내면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외부의 역할 속에 얼마나 표현하는가에 따라 삶은 수월해진다. 자신 안의 에너지가 외부의 행위를 향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을 억압할 때, 지금 실제로 하고 있는 일에는 에너지가 담기지 않는다. 그 결과 늘 지치거나 감정적이 된다. 자신 안의 원형에 잠재된 에너지가 외부의 행위와 잘 어우러질 때, 일이 쉽게 진행되고 삶이 즐거워진다." (p.281)

 

'나 자신은 세상을 향해 던져진 하나의 물음이며, 나는 그 물음에 나의 해답을 제시해야만 한다.'고 했던 칼 융의 말처럼  우리들 각자는 자신만의 해답을 제시하기 위해 삶을 소진하는 게 아닌가.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이 자신의 의지가 아닌 '세상이 주는 답에 따라 살아가는' 게 현실. 의도하지 않았던 삶의 변화에 스트레스를 받고 원치 않은 상황에서 좌절하며 때로는 앞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현실 앞에서 모든 걸 포기하기도 한다. 제대로 된 원인도 찾지 못한 채 말이다. 류시화 시인의 번역으로 출간된 이 책은 삶에서 발생하는 하나의 문제가 오직 한 개인에게 국한되지만은 않는다는 걸 말해준다.

 

"당신은 나에게 배우고 나는 당신에게 배운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성장하는 방식이고,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다. 당신 개인의 삶은 인류의 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하나의 물줄기이다. 당신은 자신의 삶이 얼마나 많은 차이를 만들어내는지 정확히 알 수 없겠지만, 자신의 삶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중요하다는 것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의 삶이 그러하듯이." (p.310)

 

간밤에 지나간 비로 바깥공기는 답답하고 끈적끈적하다. 쉴 새 없이 던져지는 삶의 문제들을 무작정 바라만 보거나 오직 자신의 힘만으로 해결하려는 생각은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애초부터 세상은 그렇게 설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점심을 먹은 지 1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배가 고프다. 체중이 늘면 늘수록 육체가 던져주는 답에 따라 살게 되는 것처럼 내가 세상을 향한 나만의 해답을 준비하지 못한다면 삶은 여전히 불만족스러울 것이다. 무덥고 습한 오늘의 날씨가 마냥 불만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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