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 장혜령 소설
장혜령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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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늘 옳았던 건 아니다. 제복을 입은 어느 경찰관 앞에서 했던 어눌한 진술처럼 기억은 언제나 자신이 없었고, 증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이었으며, 나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어떤 이에게 내보였을 때 내게 올지도 모를 불확실한 미래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임을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의 불안은 내 기억의 끄트머리에 달린 작은 물방울처럼 맺혔는지도 모른다. 땅을 향해 금방이라도 추락할 듯한 작은 물방울. 그런 불안. 적어도 나의 머릿속에 있는 기억은...

 

"빛이 잘 들던 어느 오후, 해가 다 저물도록 불 켜지 않은 방에 누워, 그 방 작은 창으로 들어온 태양빛이 사위어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한 남자. 매해 봄꽃이 필 때면 코끝에 와닿는 그 향기, 눈부신 색채의 찬란함을 견디지 못해 빛이 다 사라질 때까지, 베란다에 있는 모든 화분에 불을 지르고는 타오르는 꽃의 혼을 킬킬거리며 바라보던 한 남자. 꽃이 재가 되어 흩날릴 때에야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웅크린 채 고통스러워하던 한 남자.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채 스스로 문을 잠그고 그곳에 남아 있던 한 남자를, 나는 오래 기억하고 또 기억했습니다." (p.151)

 

어떤 소설은 이야기의 윤곽보다 시간에 따른 느낌의 변이만 선명하게 남는다. 온화한 갈색이었다가 새벽녘의 푸른빛이었다가 투명한 흰색이 되기도 하는... 장혜령의 소설 <진주>는 그런 책이었다. 학년 초, 가정환경조사서를 작성한 뒤 교실에서 그 내용을 발표할 때, "아버지는 나라를 위해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했다. 대학 시절부터 이십 년 남짓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에 매진했던 아버지를 둔 딸의 자전적 기록이기도 한 이 소설은 작가의 혼란스러움을 반영하듯 일인칭과 이인칭·삼인칭이 혼재되었고, 사건의 기록들이 시간 순서와 무관하게 등장하며, 삽화와 사진·그림 등 시각적 자료들이 텍스트의 중요한 일부로서 작용하기도 한다. 때로는 작가가 쓴 시가 묘사의 일부를 대체하기도 하고 그에 덧붙여진 날짜가 수감번호처럼 뜬금없게 만들기도 한다.

 

가정환경조사서 사건이 있은 후 작가는 엄마와 함께 난생처음 비행기를 타고 진주로 가서 감옥에 있던 아버지를 면회했다. 그로부터 이십여 년이 지난 20152, 어른이 된 작가는 다시 비행기에 올라 진주로 향했다. 그렇게 탄생된 소설 <진주>는 작가 자신에 대해서 쓴 이야기인 동시에 작가의 아버지에 대해 묻고 싶었던 질문들이며, 듣고 싶었던 대답이다. 감옥에 있어 부재했던 상태의 아버지가 그리움과 존경의 대상이었다면, 딸이 중학생이 되어 나타난 아버지는 '개인적인 삶'에 충실한 평범한 가장이 아니었다. 작가가 기다리던 아버지는 아버지의 존재가 건넌방에 상주하면서부터 완전히 사라진 셈이었다. 아버지의 동지였던 엄마가 "이제 그만 불의를 참아달라"며 눈물로 호소하는 그 순간에도 딸은 아버지에게 묻고 있다. 당신은 누구냐고.

 

안산의 노동자 상담소에서 어려운 처지에 놓인 노동자들을 상담하고 소식지를 만들던 아버지와 노동 교회가 운영하는 탁아소 선생님으로 근무했던 엄마. 노동자 자녀들과 함께 컸던 딸은 동요 대신 투쟁가와 민중가요를 불렀고, 경찰을 '짭새'라 부르기도 했다. 추리닝과 슬리퍼 차림으로 딸의 과제물을 들고 학교에 나타났던 아버지를 고개를 돌려 회피했던 딸은, 남편과 떨어져 옷 수선집을 하며 키운 딸은 자신의 이야기가 아버지에게 가 닿음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이야기가 된다는 사실을 이제 알 것 같다고 말한다.

 

"시간이 지나면 잊힐 거라고, 괜찮아질 거라고, 삶은 그런 거라고 자신을 타이르려 했다. 그때까지 나는 틈만 나면 내 방 불을 끈 채 죽은듯 잠을 청했고, 화장실 가는 소리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도록 유령처럼 걸어다녔으며, 아버지 어머니가 완전히 잠든 시각에 집에 들어오고서도 또다시 새벽까지 집밖을 배회했고, 아침이면 관성처럼 입속에 밥을 떠넣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내 안의 누군가가 그러한 삶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곳으로 가자. 그곳으로. 그 사람은 내게 진주로 가자고 했다." (p.279)

 

하냥 걸어온 저 시간들이 기억의 끄트머리에 달린 물방울처럼 문득 낯설어질 때가 있다. 그 물방울이 햇빛에 말라 공기 중으로 스러지거나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땅에 떨어지지 않는 한, 우리는 기억의 줄기를 타고 아득히 먼 과거를 향해 불안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  그것이 비록 원시를 향한 아득히 먼 여정처럼 보일지라도, 결코 닿을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우주처럼 여겨질지라도 우리가 불안을 딛고 나아가기만 한다면 우리는 결국 그곳에 닿을 수 있다. 작가가 진주로 향했던 것처럼.

 

장혜령의 <진주>를 읽고 나는 군더더기처럼 나의 기억을 덧대려 한다. 나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술에 의지하여 세상을 살았고, 술에 취하지 않은 시간보다 취한 시간이 더 많았던 사람이다. 세상에 대한 불안을 술을 매개로 하여 잊어보려 한 셈인데, 당신의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고, 그것에 대한 울분은 가족을 향한 폭력으로 풀었다. 당신의 습관적인 폭력과 중독 증세는 길게 이어졌던 병원 생활과 함께 끝났지만 가족 모두에게 심어준 그 암담했던 기억들을 다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나는 여전히 기억의 끄트머리에 대롱대롱 매달린 불안의 물방울을 보고 있다. 당신이 세상에 없는 지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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