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수(午睡)를 즐기기에 가을이라는 계절은 아깝다는 생각이 살짝 들기는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께느른한 햇살이 거실 바닥을 반쯤 점령하여 세상은 온통 나른한 기운으로 가득했던 걸. 투명한 가을 풍경이 눈꺼풀에 걸려 아른아른 멀어져 갈 즈음, 동네 놀이터에선 까르르까르르 아이들 해맑은 웃음소리가 자장가처럼 또는 할머니의 옛이야기처럼 귓가에 퍼지더라. 이쯤 되면 밀려오는 졸음을 나로서도 어찌할 재간이 없었던 게야.
그렇게 한두 시간을 잤던 것 같아. 아무 걱정도 없이. 정말이지 평화로운 세상이었어. 일어나 보니 글쎄 텔레비전만 홀로 떠들고 있지 뭐야. 구경꾼도 없는 방에서 지치지도 않고. 잠도 덜 깬 멍한 정신으로 커피 한 잔을 마셨어. 달달하고 텁텁한 커피 믹스 특유의 향이 잠도 깨지 않은 나를 깊은 수렁으로 이끄는 듯했어. 온몸에 묻은 나른함을 털어내기 위해 베란다 창문을 열었어. 소슬한 바람이 목을 타고 어깨까지 파고들더군. 가벼운 바람에도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
가을이 깊어간다는 게 이런 느낌이었을 거야. 문득 드는 쓸쓸함,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우울. 이창래의 소설 <영원한 이방인>을 읽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내려놓게 되더군. 재미가 없었던 건 아니야. 다만 우울했거나, 잠이 덜 깼거나, 시간이 아까웠던 게지. 계절은 여전히 석양에 빛나는 노란 은행나무의 껑충한 우듬지에 걸려 있었을 테지. 오수를 즐기기에는 가을의 오후는 너무 짧았는지도 몰라.